어떤 영화의 정체성은 그 영화에서 묘사된 것보다 묘사되지 않은 것에 의해 더 잘 규정된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렇다. 이 영화는 프랑스 대혁명의 희생양 혹은 한 원인으로 빠짐없이 거론되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주인공으로 삼고도 혁명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왕실과 왕실 사람들의 사생활에만 카메라를 들이대는 이 두 시간 남짓한 작품에서 왕실 밖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은 110분의 러닝타임이 지나고 나서이다. 그리고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가 파리로 가는 마차 안에서 급작스레 막을 내린다. 앙투아네트와 관련한 가장 극적인 사건일 단두대는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프랑스 대혁명은 영화 속 스캔들의 대상인 뒤바리 부인이나 페르젠 백작보다도 비중이 적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그리는 영화라고 반드시 프랑스 대혁명을 묘사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인물과 관련해서 거의 자동연상되는 결정적 사건들을 누락시키고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면, 거기엔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장 큰 문제는 프랑스 대혁명을 묘사하지 않았다는 몰역사성이 아니라, 이야기나 인물을 읽어내려는 시선 자체가 희미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소피아 코폴라는 앙투아네트를 그려내고 싶었던 게 아니라, 이전보다 훨씬 더 화려한 틀 안에 커스틴 던스트라는 예쁜 피사체를 넣고 그저 10대 소녀의 감성을 담아내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앙투아네트라는 인물을 채택한 것은 소재의 낭비에 다름 아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시작되면서 흘러나오는 영국 밴드 갱 오브 포의 노래 <Natural’s Not in It>은 이 영화의 내용과 형식을 그대로 암시한다. 과도한 예법으로 도배된 베르사유 궁전이란 세계에는 자연스러움이 존재하지 않기에 천진한 앙투아네트가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시대극임에도 펑크록을 선곡한 데서 드러나듯 오랜 이야기를 모던한 감각으로 새롭게 단장해 들려주겠다는 것이다.
확실히 초반부엔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여기엔 오스트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시집가는 열네살 소녀의 흥분과 당혹과 고독이 비교적 생생하게 담겨져 있다. 소녀의 감성을 소피아 코폴라만큼 잘 다루는 미국 감독도 드물 것이다. 외형적인 현격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코폴라 전작인 <처녀 자살 소동>과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연장선상에 있는 영화다. 군중 속의 고독과 소통 단절의 문제를 영화적 테마로 삼아왔던 그는 앙투아네트를 ‘프랑스라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외로운 오스트리아 소녀’로 그렸다.
그러나 그저 그것뿐, 나머지를 채우는 것은 “그녀가 잠자리를 거부하는 남편과 언제 섹스에 성공할 것인가”라는 섹스코미디적 모티브와 궁정의 너절한 연애담밖에 없다. 꽃구경도 한두번이지, 아카데미 의상상을 받은 화려한 복식의 눈요기만으론 반복적이고 나열적인 구조의 권태를 이겨내긴 쉽지 않다. 록 음악 위주의 선곡에서 단적으로 표현되는 이 영화의 모던한 감각이라는 것도 금세 신선함을 잃는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 절묘하게 인물의 심리에 들러붙었던 음악과 달리, 이 영화의 음악은 특정한 분위기를 형성하거나 이야기와 합치되지 못한 채 그 자체로 동동 떠 있을 뿐이다.
소피아 코폴라가 커스틴 던스트라는 배우를 마리 앙투아네트로 선택했던 순간부터, 이 영화의 색깔은 이미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강력한 캐릭터를 맡고도 스스로의 개성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은 이 여배우 때문에 이 영화는 절반의 흥미를 얻은 대신 절반의 완성도를 잃었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커스틴 던스트를 흠모하다 못해 숭배한다. 여기서 커스틴 던스트는 귀엽고 사랑스럽다. 하지만 깊거나 인상적이진 않다. 던스트야 참 좋은 기념품으로 이 영화의 DVD를 챙길 수 있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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