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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성실하게 살았다는 게 면죄부는 아니다.... 계몽영화
ldk209 2010-10-19 오후 4:55:08 582   [0]
열심히 성실하게 살았다는 게 면죄부는 아니다.... ★★★★

 

<계몽영화>는 3대에 걸친 정씨 집안의 얘기를 이리저리 시간을 오가며 풀어 놓는다. 시간순으로 간단히 정리하자면, 1931년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일하는 정길만(이상현)은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일본인 상관으로부터 자주 지적을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은인이기도 한 독립운동가인 친구가 찾아와 중요한 정보를 흘리는 데, 정길만은 그 정보를 자신이 성공하는 발판으로 활용한다. 1965년 서울. 정길만의 아들이자 주식회사에 근무하는 정학송(정승길)은 여교사인 박유정(김지인)과의 네 번째 데이트에서 티파니 반지를 선물로 주며 프로포즈에 성공한다. 1985년의 서울. 정학송의 어린 딸 정태선(신규리)은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의 술 심부름과 카라얀 연주회 녹음을 도맡아 하지만 아버지의 일상적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2010년의 현재의 서울. 아들의 조기교육 때문에 미국에 머물던 정태선(오우정)은 오빠 정태한(배용근)에게 아버지가 위태롭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게 된다.

 

일단 <계몽영화>가 놀라움을 주는 건, 독립영화로서 시대극을 연출했다는 사실 자체다. 시대극은 일반적으로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아무래도 독립영화가 도전하기엔 쉽지 않은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계몽영화>는 완성도 높은 시나리오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도전이라는 결과물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다만, 예산의 문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로케이션 장소가 적어 시대극으로서는 단조로운 화면을 보여주는 편이다. 아마도 시간을 짜깁기해 연출한 이유 중 하나는 이러한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한 것 아니었을까 싶다.

 

<계몽영화>는 그 동안 우리가 봐왔던 시대극과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정씨 집안은 친일파의 거두도 아니고, 독립운동가 집안도 아니며, 평범한 민중도 아니다. 지금의 현실에서 보자면 대략 중상위층 정도? 이러한 시각의 변화는 그 동안 영화나 TV 드라마의 시대극이 보여줬던 도식성에서 벗어나게 해 주기도 하지만, 현실이 이렇게 흘러오게 된 원인을 좀 더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근본적 개혁을 밑에서부터 방해하고 기존 권력의 유지에 가장 크게 기여를 한 세력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권력의 뿌리가 친일파에서 이어져 오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단적으로 <계몽영화> 속 정씨 집안의 현재 물질적 토대는 친일의 대가로 얻어진 것이 고스란히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다. 조금 도식적으로 정리하자면 역사적으로 친일파는 해방 이후에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등에 의해 그 지위와 권력을 인정받았고, 해방정국에서 친미세력으로 돌변한 이들은 오랫동안 독재정권의 굳건한 지지 세력으로 힘을 유지해 왔다. 이들이 단순히 정치권력만을 장악한 건 아니고, 영화에서 보듯이 부동산 투기, 교육 열풍, 조기 유학 등의 천민자본주의 문화의 이식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점은 매우 중요하다.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회,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중요한 사회, 어떻게든 나와 내 가족만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사회, 부당하거나 불합리한 것이 있다고 해도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것이 아니면 모른 척 넘어가는 게 좋은 사회, 모난 정이 돌 맞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사회, 그러니깐 뭔가 천박한 가치관이 내부에 강하게 흐르는 현실의 대한민국은 바로 친일파들과 그 후예들이 우리 사회에서 살아남고 여전히 권력을 누리기 위해 강조하고 실행해 온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계몽영화>가 중요한 건 바로 그 주체들이 사회적으로 주목받기 쉬운 친일파의 거두들이 아니라 정씨 집안과 같은 위치의 이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면서 <계몽영화>는 빈 여백을 두어 관객의 상상을 유도한다. 사실 어떤 점에서 <계몽영화>는 상당히 불친절하게 느껴진다. 주요 인물들의 변화 과정이 아무런 묘사 없이 점프해서 보여 지기 때문이다. 왜 우유부단한 정길만은 독한 친일파로 변신하게 되었을까? 클래식을 좋아하고 사람에게 친절하던 정학송은 왜 어린 딸을 폭행하는 알콜중독자가 됐을까? 아마도 대학생 때 열심히 학생운동을 했던 정태선은 친일의 대가인 부의 혜택을 받으며 조기 유학 대열에 합류한 전형적인 강남 아줌마가 됐을까?

 

<계몽영화>의 박동훈 감독은 이들의 이런 모습을 통해 연민의 시선을 던진다. 정학송은 태선의 소풍 사진을 보며 “왜 구석에서 사진을 찍어. 가운데 서 있어야지!”라며 힐난한다. 알고 보면 이들은 이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들이며, 이러한 모습은 우리 자신과 주위에서도 쉽게 발견되는 모습들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주변부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잘 살기 위해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살았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면죄 받아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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