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택이라는 위험부담에 대하여
소중한 여가시간을 보내기 위한 영화 한편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모든 결과가 반드시 좋으리란 법은 없다. 아니, 오히려 아쉬움을 남기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해야할까. 좋아하는 감독이 연출한 영화만 골라 dvd로 감상한다고 해도, 간간히 아쉬운 점을 발견하는 경우가 반드시 생긴다. 그러니 수많은 영화들이 무차별적으로 개봉하는 극장가에서는 어느 정도의 위험부담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이런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제작진, 예고편과 스틸컷, 시놉시스라는 기본적인 정보를 관람전에 최대한 들여다 본다. 특히 거의 처음 듣는 감독이거나, 아직 연출력을 보장할 수 없는 이가 감독을 하였을 경우엔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영화 <퀵>을 선택하게 되는 근거는 무엇에 있는가? 첫째, <해운대>신화의 주인공 윤제균 감독과 열연을 펼쳤던 이민기, 강예원의 주연작이라는 것. 둘째,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스피디 액션영화'를 시도했다는 점. 셋째, 제작비 100억원 이상이 들어간 국산 블록버스터 영화로서 <고지전>과 맞불을 놓고 있는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보너스로 이런 기대를 품에 안은 티저 예고편도 관객들의 이목을 끄는데 효과를 보였고, 그 결과 개봉주 예매율 1위를 두고 올 여름 국내 최대 흥행야심작중의 하나인<고지전>과 박빙을 벌일 수 있었다.
하지만, 늘상 그 다음이 문제다. 극장 문턱까지 초대해놓고 나서 보여주는 것이 최소한 예고편 이상이 되는 작품이냐는 것이 관건이다. 불길하게도 <퀵>의 예고편을 관람하는 순간 뇌리를 스쳐가는 문장은 '모 아니면 도'였다. 이미 예고편에서부터 <아일랜드>나 <드리븐>, <스피드>등에서 봐왔던 클리셰들이 넘쳐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각보다 많은 액션영화들이 예고편으로 관객들을 사로잡기 위해 영화에서 가장 이목을 끄는 쇼트들을 서슴없이 배치한다. 만약 이 장면들이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예고편과 다를 바 없이 그저 비주얼만 덩그러니 넣어버리는 형태라면, 결과는 예고편이 전부였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퀵>은 그 우려를 스크린에 재현하고 말았다.
대실망, 난장판쇼 - 최소한의 기본조차 없다!
영화 초반부에서부터 지적되고, 후반부까지 줄기차게 드러내는 문제점중의 하나는 바로 '대사'이다. 그것도 아주 총체적으로 심각한 수준이다. 등장인물들은 시종일관 이들은 무대포식으로 크게 지르고, 빠르게 떠들어대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도대체 등장인물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심지어 협박범의 목소리는 통화품질이 않좋은 곳에서 받는 것처럼 들리는 탓에 변조한 목소리의 사나이 그 이상의 존재감을 형성하지 못한다. 아무리 비주얼을 중요시 하는 영화라고 해도 무성영화가 아닌 이상, 상업영화에서 대화내용의 디테일이 심하게 뭉게진 것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영화의 기본 뼈대인 각본의 대부분을 이루는 것이 바로 대사 아닌가. 이것이 전달되지 못하는 순간, 영화는 그 때부터 맥락을 알 수 없는 스크랩 영상물로 둔갑하고 만다.
이 문제점을 베이스로 깔아둔 상태에서 다른 문제들이 계속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바로 어줍잖게 끼워맞춘(실상 맞추려고 노력하지도 않는)사건과 사건간의 연결고리와 설명이다. 이야기를 꾸려가는 세 가지 축으로서 기수와 아롬의 폭탄 배달, 이들을 조정하는 자를 밝혀내긴 위한 과정, 기주(이민기)와 아롬(강예원)의 연애사가 있다. 그러나 이 세가지는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어떠한 시너지 효과도 내고 있질 못하다. 개인적인 연애사는 그저 쭉 진행되다가 형식적인 플래시백을 통해 한번씩 비춰주는 식으로 나오고 있을 뿐, 전후 맥락에서 진행되는 감정적인 전조나 고조 따윈 관심이 없다. 막장 예능에서 보여주는 툭툭 내뱉기식 전개만이 가득할 뿐이다.
사건에 최소한의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줄 배후 조정자에 관한 부분은 더 가관이다. 폭탄 사고가 두 차례정도 일어나는 동안 아주 잠깐씩 비쳐진 조직들의 모습이 스쳐지나더니, 갑작스레 서형사(고창석)의 아웃사이더 랩같은 브리핑으로 모든 상황을 갑작스레 설명해버린다. 그것도 전 문단에서 지적했던 단점을 그대로 안은채로 이야기한다. 영화속에서의 시간이 아무리 다를 지언정, 바로 전 쇼트에서 어리벙벙한 모습으로 일관하던 사람이 그 다음 쇼트에서는 모든 것을 다파악한 채로 설명해버리는 황당한 상황을 안겨다주는 것이다. 이후의 전개 역시 이런 식의 엄청난 비약으로 점철되어 전후상황없이 말로서 모든 것을 한순간에 설명해버린다. 과거 조범구 감독은 '시나리오의 접근 방식'이라는 강연에서 이와 같은 말을 하였다.
"초보자가 흔히 범하기 쉬운 실수는 인물의 행동이 아닌 대사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보여지는 것이고, 말이 아닌 보여지는 무엇, 즉 행동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야 한다."
그러나 <퀵>에서는 정작 축이되는 사건은 죄다 말로(웅얼대는 말투로 장황하게) 급 요약해버는가 하면, 보여지는 행동들은 이야기의 전개보다는 연기자들의 순간적인 개인기와 소란피우기만이 난무하고 있다. 이렇다보니 자연스레 대부분의 캐릭터들은 그저 시장판에서 난동피우는 남자1, 남자2, 여자1, 여자2 정도에 불과한 디테일밖에 갖추지 못한다. 아무리 베테랑 연기자들을 캐스팅한다 해도, 제 아무리 구르고 뛰는 노력을 한다 해도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부여되버린 것이다.
어디서 본 것만 많고, 유치함은 하늘을 찌른다!
실망의 원인이 '액션 영화에서 비주얼이상으로 많은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퀵>에서는 결코 적용될 수 없다. 심지어 그 비주얼에서 조차 곱게 봐줄 수 없는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거슬리는 CG들이 숱하게 노출되는 문제는 사실상 논외로 넘겨버린다 해도, 이른바 클리셰라고 불리는 진부한 장면 설정을 마구잡이로 차용해서 넣는다는 것이다. 이미 앞서 말한 것처럼 마이클 베이의 영화에서 보던 자동차 추격도중의 차량파괴 장면, 드리븐에서 보여진 바람에 날리는 치마 장면, 숱한 액션영화에서 보던 군중헤쳐나가면서 부딪히는 군중들등 정말로 많은 것들을 차용하였다. 허나, 이 촬영된 장면들조차 상당수는 불필요하다 싶을 정도로 늘이거나, 혹은 동일한 반복을 해대는 경우를 보이므로서 보는 이로 하여금 상당히 거슬리게 만든다.
이렇다보니 정작 표방하고 있는 스피디 액션무비로서의 장점은 쉽사리 드러나질 않는다. 영화 중반부에 등장하는 유일무이한 킬러씬으로 거론할 수 있는 터널 묘기 장면만 제외한다면, 대다수의 바이크씬에서 쾌감이나 속도감을 느끼긴 쉽지 않다. 오히려 제작노트에서 밝히던 '성룡식 액션'을 과도하게 차용하면서 생긴 억지스런 슬랩스틱이나 대화내용들이 액션 영화로서의 장점을 죄다 앗아가버린다. 아무리 A급 제작비에 B급 정서를 살린다고 하여도, 영화가 애초에 내건 슬로건을 망각한 채로 유치한 느낌만 과다 투입하다보니 영화는 자연스레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무식하게 터지는 폭탄으로 벌어지는 아수라장만 눈에 띈다. 흔히 물량공세식 블록버스터들이 범하는 오류중의 하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몰입도가 떨어지는 사건 전개속에서 코믹함을 넘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가득한 분위기에서 발생하는 폭발은 '스펙터클'의 기능조차 미미해져 버린다. 예고편에서 공개되어 기대되었던 시내 폭발 장면 역시도 안타깝게도 오프닝의 퀵서비스 첫 배달을 통해 순식간에 소비되버렸다.
아쉬운 헐리웃 블록버스터들을 위대하게 만드는 힘(?)만 발휘하다
한국형 <스피드>를 꿈꾸는 야심을 갖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도전은 아름답다'라는 식으로 내놓은 결과물에서 영화로서의 기본을 망각한 채로, 피상적인 것만 쫓아오면서 뽑아낸 작품을 무마하는 것은 관객으로서 차마 못할 짓이다. 그것은 되려 한국 영화산업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다소 과한 찬사를 받았긴 했었으나 <아저씨>는 한국식 '본 얼티메이텀'이라는 별칭을 붙여도 좋을 만큼 완성도 높은 액션씬을 구사했다. 그리고 그 주체가 되는 캐릭터 묘사, 주인공에 대립하는 안티히어로 세력의 성격과 분위기 형성에도 큰 신경을 썼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퀵>이 걸어가려했던 스피드 액션 영화는 창조적 변형을 구사하지 못하고, 무분별한 차용과 완급조절의 실패로 얼룩진 망작이 되었다. 덕분에 평소 아쉬움이 다소 남았던 여러 액션영화들이 새삼 대단하게 보이는 상대적 현상까지 낳고 말았다. 멋진 백반상을 차릴 식재료를 그저 막무가내로 뒤섞어 퍽퍽해진 비빔밥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려 100억이다. 이렇게 제작비가 헛되이 쓰이는 영화를 보는 것은 진정 고문 중의 고문이다.
P.S.1. <비열한 거리>와 <열혈남아>에서 기운 센 악역의 모습을 보여준 윤제문도 별 수 없다. 그가 이런 각본과 설정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다.
P.S.2. 도대체 등장인물들은 평소에 무슨 폰을 쓰길래 3~4명이서 통화를 동시에 하는 거냐. 그것도 쓸떼없이 정신없는 편집으로 오락가락해서 머리 아픈 판국에.
P.S.3. 사건 내용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그다지 상관은 없지만). 왜냐구? 당최 좀 들려야 말이지 !!
P.S.4. 스턴트맨과 배우, 스텝진들의 노고에 동정심을 갖고 별점을 줄 순 없다. 그들은 어떤 작품에서든 최선의 노력을 다해왔으니까. 열심히 했다는 것과 잘 만들었다는 것은 확실히 구분하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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