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초의 본격 법정 스릴러... ★★★☆
※ 영화의 결말이나 중요한 설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의뢰인>이 내세우는 가장 핵심적인 홍보 문구 중 하나는 ‘대한민국 최초의 본격 법정 스릴러’다. 대한민국 최초라는 건 우리도 해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처음이기 때문에 좀 서툴고 부족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의뢰인>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문구일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의뢰인>의 디테일은 꽤 꼼꼼하고 세밀하며, 최소한 말이 안 되지는 않는다. 반면 전체적인 장르적 관점에선 좀 아쉬운 점이 있다. 왜 지금까지 재판이 중심이 되는 스릴러 영화가 한국에 부재했었는가는 (물론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장르 영화로서 아마 최초라고 불리는 게 맞을 것이다) 기술적이라거나 다른 특별한 이유 때문은 아니다. 그건 단지 엄격한 증거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의 재판이 재미없기 때문이다. 실제 대부분의 재판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말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문서로서 오고갈 뿐이다. 따라서 <의뢰인>같은 법정 스릴러가 나오게 된 건, 기존 한국 재판 시스템의 변화, 즉 일부 배심원 제도가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시체가 없는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출장에서 돌아온 한철민(장혁)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아내 서정아(유다인)를 살해한 혐의로 긴급 체포된다. 담당 검사인 안민호(박희순)는 한철민이 평소 의처증을 앓아오다가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자 살해했다며 기소한다. 피의자의 변호를 맡게 된 강성희 변호사(하정우)는 배심원 제도 도입을 요구하며 재판 기일을 늦추고는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 사건에서의 핵심은 시체가 없다는 점이다. 게다가 살해 현장인 아파트에 누군가가 강제로 침입한 흔적은 보이지 않고, 용의자의 지문이나 어떠한 DNA도 발견되지 않는다. 강 변호사는 검찰이 유력한 증거인 아파트 CCTV 데이터를 빼돌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확보하기 위해 담당 경찰에 대한 접촉을 시도한다.
이 영화에 대한 아쉬운 점을 먼저 늘어놔 보자. Who - ‘누가’에 초점이 맞춰진 스릴러 영화는 ‘반전’이, How - ‘어떻게’에 초점이 맞춰진 스릴러 영화는 ‘구성’이, Why - ‘왜’에 초점이 맞춰진 스릴러 영화는 ‘감정’이 중요해진다고 한다. 만약 시체가 실종된 살인사건이 일어났고 유력한 용의자가 검거됐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어떠한 점이 관객의 흥미를 끌어 모으는 요소가 될 것인가? 과연 용의자가 정말 범인인가? 또는 어떻게 살해했고 어떻게 시체를 유기했는가? 아마 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의뢰인>은 ‘누가’와 ‘어떻게’에 동시에 초점이 맞춰진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위의 구분에서 보자면 반전과 구성이 중요한 영화가 되는 데, 문제는 구성, 즉 ‘어떻게’를 모르고서는 범인을 확정짓기 곤란하다는 점이다. 현실에서야 다른 문제일 수 있지만, 장르 영화에서 정황 증거만으로 범인을 단정 짓고 끝낼 수는 없다. 그런데 <의뢰인>은 전자, ‘어떻게’에 대한 관심은 배제한 채 후자, ‘누가’란 부분에만 관심을 집중한다. 그러다보니 재판에서 ‘어떻게’에 대한 얘기는 나오지 않고, 용의자가 평소 어떠한 행실의 사람이었는지, 살해할만한 동기가 있었는지에 대한 정황 증거만이 마치 산탄총처럼 마구잡이로 정보를 쏟아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나눠 살펴보면, 반전이 중요한 영화, ‘누가’에게 초점이 맞춰진 영화에서 용의자는 끝까지 드러나지 않거나 또는 다수의 용의자가 존재할 때 반전의 효과는 배가된다. 그런데 <의뢰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명의 용의자만이 존재한다. 물론 <프라이멀 피어>처럼 단 한 명의 용의자만으로도 충분히 놀랍고 대단한 반전을 뽑아낼 수도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영화가 관객에게 용의자에 대한 결백 또는 혐의를 100% 믿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차원에서 <의뢰인>은 조금 아쉽다. 재판이 끝나는 시점까지도 관객에게 저 용의자가 결백한지 또는 범인인지 확실한 믿음을 주지 못하고 검사와 변호사 사이에서 애매모호한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반전은 어느 정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진행 경로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재판의 마지막 하정우의 깜짝 쇼 및 이에 대한 박희순의 멘트는 상당히 임팩트가 있다)
만약 <의뢰인>이 ‘어떻게’에 초점이 맞춰진 스릴러 영화라고 해도 아쉬운 점은 남는다. 앞에서도 잠깐 얘기했지만, 어떻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그것도 복도식 아파트에서 시체를 유기했는가? 그런데 영화는 살해 및 시체 유기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다가 재판이 끝나고 나서야 갑자기 중요한 핵심 문제로 부각시킨다. 그런데 마지막에 밝혀지는 범죄의 과정도 치밀한 추리로 인해 얻어지는 게 아니라, 우연히 발견하거나 또는 범인의 고백으로 밝혀진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엔 역부족이다.
이 영화가 얼마나 현실의 대한민국 법정을 잘 옮겼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재판의 진행 자체가 주는 긴장과 재미를 구현하는 데 일정한 한계는 느껴진다. 내가 이렇게 느끼는 건, 기존의 헐리웃 영화나 미드의 법정 장면에 길들여서 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의뢰인>에서의 재판 과정엔 소반전이 주는 짜릿함이 별로 없다. 그러니깐 검사에게 유리한 증거나 증인이 반대로 뒤집히는 상황 또는 변호사에게 유리한 증거나 증인이 뒤집히는 상황이 주는 쾌감의 부재. 예를 들면, 청각장애인의 할아버지가 변호사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게 되고, 검사는 증언에 대한 대가가 있었음을 밝혀 변호사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그런데 관객은 이미 변호사 쪽의 브로커(성동일)가 돈(피해 보상금)을 주기로 했음을 알고 있다. 또 다른 예. 서정아의 엄마는 서정아가 피살되기 며칠 전 자신에게 찾아와 ‘남편(!)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며 겁에 질려 했다고 증언한다. 이에 변호사는 엄마가 기독 광신도로서 평소 딸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다뤘으며 딸의 안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고 엄마를 곤경에 빠트린다. (물론, 변호사의 반박은 엄마가 주장하는 증언의 반론이 될 수 없다. 엄마와 딸의 관계가 아무리 좋지 않았어도 딸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검사는 지적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관객은 이번에도 이미 엄마가 그러함을 서정아 직장 동료의 증언으로 알고 있는 터였다. 관객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경로에서 반박이 진행되기에 이런 소반전들이 주는 쾌감이 느껴질 리가 없다. 이런 경우, 영화는 관객에게 너무 많은 정보를 준 것이다.
청각 장애인 소년과 같이 사건 해결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설정이 매우 중요할 것처럼 등장해 관객의 관심을 흐트려 놓는 것도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아마 영화를 본 대부분의 관객은 청각 장애인 소년이 등장했을 때, 뭔가 대단한 역할을 하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결국 그 소년으로 인해 결정적 증거가 확보되기는 하지만, 문제는 청각 장애가 그 과정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체 왜 굳이 청각장애인으로 설정했을까? 이건 단지 관객을 속이기 위한 맥거핀인가? 그런데 재판의 거의 마지막에 와서 맥거핀을?
그럼에도 두 시간이 넘는 영화 시간을 고려했을 때, 영화는 충분히 재밌고, 매끈하게 잘 빠진 것도 사실이다. 일단 지루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으니깐 말이다. 이 영화의 장점은 캐릭터와 스토리의 짜임새에서 찾아볼 수 있다. 헐리웃 영화에서 익숙한 캐릭터 설정과 구도이긴 하지만, 적당히 불량하면서도 정의로운 변호사와 변호사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으며, 범인을 잡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불법, 편법도 마다하지 않는 검사의 대립구도, 내내 무표정을 유지하다 마지막에 감정을 드러내는 용의자, 여비서가 아니라 정말 현실의 사무장 같은 변호사 사무장(김성령) 등 인물들의 캐릭터는 이 영화가 기본적으로 잘 빚어진 영화라는 점을 말해준다.
스토리 차원에서 봤을 때, 일부 의문이 남거나 좀 아쉬운 점이 있기는 해도 짜임새 있고 매끄러우며 무난하다. 특히 용의자가 자신의 직업을 이용, 추격자를 따돌리고 알리바이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라든가 범행 동기, 범행 과정의 묘사 등의 부분은 그 동안 한국 스릴러 장르 영화의 가장 큰 맹점 중 하나였던 스토리의 짜임새라는 차원에서 분명 한 단계 앞으로 나갔다고 평가해 줄 수 있다. 최소한 <의뢰인>은 말이 안 되는 얘기를 늘어놓는 영화는 아닌 것이다.
※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믿음, 신뢰에 대한 영화다. 이는 단지 장혁이 몇 차례 하정우에게 ‘자신을 신뢰하냐’는 물음을 던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가장 핵심 장면은 재판이 끝난 후 박희순이 하정우에게 말을 건네는 장면이다. 그 장면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법정에서 단 두 명만이 처음부터 이 사건이 살인사건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이 사건의 원인과 과정을 꿰뚫고 있었다는 것이다.
※ 가장 기본적인 의문을 해소해 주지 못한다. 왜 장혁이 굳이 하정우를 변호사로 지목했는지에 대한 의문. 난 처음엔 거기에서 뭔가 해답이 찾아질 것이라 기대했는데, 영화는 그 의문에 답은커녕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인물들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하려면 관객이 수긍할만한 적당한 핑계를 주어야 한다. (아마도 편집됐을 것이라 생각한다)
※ 피살자의 엄마 증언에서, 피살자는 엄마를 찾아와 남편이라고 지칭하지 않고 ‘그 사람’이라고 지칭한다. ‘그 사람이 달라졌다’고. 관객에게 일부러 혼동을 주기 위한 장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고 한다면 변호사는 엄마가 평소 딸을 어떻게 대했느냐가 아니라, 딸이 지칭한 사람이 남편이 아닌 제3자일 가능성이 있음을 부각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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