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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영화를 사랑하는 장애우의 글을 읽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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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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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cl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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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19 오후 11:42: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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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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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bigam님이 올리신 글(8716)을 매우 공감하면서 읽었습니다. <오아시스>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써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또 다른 면을 보았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 한 아픈 이들을 웃어 준 것일까? 하고 깊이 생각해 보았지요.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공주와 종두를 다시 말하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를 죽음에 몰아 넣고 성폭행까지 하려던 이 남자, 종두를 다시 부른 공주는 바보인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이런 상식을 깨는 이야기가 관객들에게 의심 없이 받아들여진 것일까?
영화에 보여지는 이야기들은 매우 사실적인 듯하지만 실은 역사를 기록한 것도 아니고, 신문 기사도 아닙니다. 만들어 낸 거짓 이야기지요.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거짓 이야기를 보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할까요? 그건 그 사실성 때문이 아니고 그 영화의 개연성이 설득력이 있을 때에 한해서 입니다.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공감 때문입니다. 장애인이든 아니든 사람이 극도로 외로울 때, 이런 일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인가요?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은 절대적으로 악인이고 조금의 호감도 가질 수 없다. 이것만이 우리 삶의 진실일까요? 사람은 참으로 다양하고, 참으로 복잡해서 꼭 이성적으로 타당한 것만 하지는 않지요. 바로 이 점이 드라마를 가능하게 하는 특수성이면서도 공주와 종두의 관계가 성립될 수도 있는 가능성의 지점입니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공주의 장애 때문에 이런 설정이 타당하다고 본 것이 아니고, 공주의 극한적인 외로움이 종두에게 전화를 걸게 한 것이라고 볼 겁니다. 누구도 이쁘다고 보아 준 적이 없는 한 여인으로서 거짓이라도 이쁘다고 불러 주었던 남자를 기억하는 것이 이상할까요? 아니, 어느 여자라도 자신을 이쁘다고 하는 사람을 그리 싫게만 기억하지는 않을 터이지요. 다만 그것이 사랑으로 가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가 필요할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왜 공주가 강간이 아니었다고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는지 물어야 할 듯합니다. 종두는 분명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의 행위가 결코 폭행이 아니었음을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물어야지요. 공주는 의사 전달이 어렵다 해도, 왜 종두조차 일언반구도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일까요? 설마 종두조차 바보였기 때문에... 또는 바보 취급을 한 작가의 의도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감독은 이 부분에 대해 아무 설명을 달지 않았더군요. 이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답을 맡겨 둔 것이겠지요. 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이런 수수께끼가 영화를 감상하는 이들의 깊은 재미이기도 하니까요. 영화가 끝나고도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늘 억울하게 누명을 쓴 채 감옥에 들어가는 종두가 안타깝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해서 <왜?>라고 자꾸 되묻게 되지요. 현실은 늘 무언가 확실한 해결을 요구하니까요. 아니,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현실을 살면서도 우리는 아마 그렇게 사실이 화안하게 밝혀지리라는 환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나 봅니다.
저는 이런 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선은 아무도 종두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피의자이고 현행범이고 파렴치범이고 더욱이 전과3범이니까요. 모든 범인은 일차적으로 범행을 부인할 터이지요. 한 번 더 생각하면,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만약 두 사람이 사랑을 한다고 말한다면, 혹 이 말을 믿는 이가 있다면, 이는 오히려 더 크나큰 웃음거리가 될 뿐이지 않을까요? 전과자와 뇌성마비 장애녀의 사랑이라..... 이것은 영화 포스터의 카피이기도 하지요. 이 말만으로도 돈벌이의 광고가 될 만하다는 것이겠지요. 만약 종두가 이렇게 말해서 사람들의 이해를 구한다면, 그들의 사랑도 우정도 사람들의 조롱과 비아냥으로 이미 땅에 떨어져 뭇발에 밟히고 더럽혀지겠지요. 종두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겁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말하지 말자. 그렇다면 공주는 이걸 몰랐을까요?
종두는 누가 보아도 <나쁜 놈>입니다. 속만 썩이는 놈이지요. 그러나 공주는 종두의 따뜻함을 알아봅니다. 공주는 누구하고도 대화를 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이겠지요. 모든 것을 들여다보고 앉아 있는 관객들조차도 공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종두는 공주의 말을 다 이해합니다. 두 사람은 두 사람의 아름다움을 알아 볼 수 있는 존재입니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어떤 설명도 필요 없습니다.
종두가 아무 말하지 않는 것이 공주에게도 첫날은 안타까워서 흥분되었겠지요. 그러나 다음날 조금 숨을 돌리고 공주는 깨달았겠지요. 그가 말하지 않았다면 그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고요. 공주가 섣불리 경찰서로 찾아가지도 않고, 침묵으로 들어간 것은 바보라서가 아니고, 너무나 깊이 그들의 관계를 아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만큼 마음이 깊은 여인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쉬이 입을 벌려 말할 수 있는 정상인보다 오히려 더 깊은 헤아림과 분별력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종두가 감옥을 허용하면서도 침묵했듯이 공주도 기인 이별을 감수하면서도 침묵했기에 그들의 천진한 사랑이 흔한 스캔들이나 가십이 아니고 세계인의 가슴을 울리는 걸작으로 남는 것이 아닐까요?
<오아시스>는 감독의 깜짝 쇼로 관객을 속여서 인도주의를 가장한 영화가 아닙니다. <오아시스>는 장애, 비장애를 떠나서 인간이 극한상황에서도 지켜갈 수 있는 인간다움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영화입니다. 공주가 단순히 <선과 악>의 기준으로 종두를 보는 여자였거나, 모든 것을 벌려 말하는 여자였다면 처음부터 이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겠지요. 세상에는 아픔을 안고 있으면서도 더없이 아름다운 것이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 한 아이가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왜 큰 아픔 때문에 망가지기도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기인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대화는 이렇게 끝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큰 아픔 때문에 더없이 아름답게 정화되기도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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