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에서 여인으로.. ★★★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샤를 페로의 동명 동화(또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원작으로 하는 카트린느 브레야의 영화다. 원작 동화는 물레에 손가락을 찔린 아름다운 공주가 저주를 받아 영원한 잠에 빠진다는 이야기다. 동화는 결국 마녀와 싸워 이긴 용감한 왕자가 공주에게 달콤한 키스를 하면서 잠에서 깨어난다는 행복한 결론으로 막을 내린다. 공주가 잠자는 동안에 벌어지는 일이란 없다. 그저 공주는 잠에 빠진 채 왕자가 자신을 구하러 올 때까지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샤를 페로가 처음 이 동화를 썼을 때, 원작으로 삼았던 이야기는 잠자는 공주를 강간하는 귀족, 자는 공주의 임신 및 출산, 욕정을 참지 못한 귀족이 다시 공주를 찾아와 즐기는 이야기, 이를 알게 된 귀족의 아내가 공주와 아이를 죽이기 위해 모략을 꾸미는 등의 잔혹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고 한다. 하긴 대게의 동화들이 알고 보면 매우 잔혹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기는 하다.
어쨌거나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로망스> <팻걸> <미스트리스> 등을 통해 여성의 욕망을 매우 기괴하면서도 노골적으로 표현했던 카트린느 브레야 감독이 <푸른 수염>에 이어 내 놓은 동화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이다.(세 번째 작품은 <미녀와 야수>) 그녀의 영화에서 여성이 원작 동화에서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잠만 자다가 왕자의 키스에 깨어나 행복한 결말을 맞았다는 식의 얘기는 애당초 기대하지도 않는 게 좋다.
영화의 처음은 동화와 대동소이하게 시작된다. 서늘한 가위소리. 마녀는 갓 태어난 아기의 탯줄을 자르며 16살이 되면 물레가시에 찔려 죽을 것이라는 저주를 내린다. 뒤늦게 도착한 세 명의 요정은 저주를 풀지 못하고 6살이 되면 가시에 찔려 100년 동안 잠드는 것으로 마녀의 저주를 덮어씌운다. 6살에 잠이 든 아나스타샤 공주(칼라 베사이누)는 잠에 빠져 꿈나라를 헤맨다. 영화는 여기에서부터 마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이상한 곳을 헤매는 어린 공주의 여정을 보여준다.
기찻길에서 만나게 된 중년 여인과 피터(케리안 마얀)와 함께 살게 된 공주는 피터를 친오빠처럼 따르며 즐겁게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피터는 눈의 여왕에 홀려 집을 떠나고 공주도 피터를 찾아 길을 나선다. 안개 속 기차를 타고 도착한 기괴한 인형들이 서 있는 기차역에 내린 공주는 왕자와 왕자비가 사는 성에 도착하지만 피터는 없고, 왕자의 도움으로 마차를 타고 떠난 길에서 집시 도적들의 공격을 받아 그들의 본거지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집시 소녀의 도움으로 탈출한 공주는 나귀를 타고 바람의 여인을 찾아가 그녀의 조언대로 눈밭 한가운데 열린 빨간 열매를 먹고 잠에서 깨어난다. 그 사이 공주는 16살의 아나스타샤(줄리아 아르타모노프)로 성장해 있고, 피터의 후손인 호안(데이비드 쇼세)이 그녀를 맞는다.
누구의 영화인지 모르고 봤다 해도 아마 카트린느 브레야 감독 영화가 아닐까 했을 정도로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전반적으로 카트린느 브레야의 인장이 강하게 박혀 있기는 하다. 미니멀한 화면 구성, 비전문배우의 연기, 비뚤어진 인성 등. 영화에서 중세시대 코르셋을 벗는다는 행위 등이 당연히 억압된 여성성에서 해방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는 건 너무 뻔하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 호안과의 성적 관계, 찢어진 스타킹 등으로 마무리 되는 건 결국 이 욕망의 실체가 여성(아나스타샤)의 것이 아니라 남성(호안)의 것, 남성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는 것도 너무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이 영화에서 느껴지는 건 동화 3부작이란 여정을 놓고 봤을 때의 성장이라는 키워드다. 어린 신부가 남편의 종용에도 불구하고 끝내 순결을 고수했던 전작 <푸른 수염>에 비해 <잠자는 숲속의 미녀> 속 공주는 스스로 선택한 관계를 통해 순결이라는 막을 제거해 버린다. 소녀에서 여인으로의 성장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하는 지점이다. 또 하나 중요한 건, 순결이든 섹스든 그것의 결정권을 여성이 주체적으로 행사한다는 점이다.(<푸른 수염>의 어린 신부가 순결을 고수한 것도 남성의 보호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의 결정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코르셋의 단추를 매일 몇 개까지 풀 수 있도록 호안에게 허용(허락)한다. 관계의 주도권 행사. 그리고는 어느 날 완전히 단추가 풀린 코르셋만을 남겨 놓고는 사라져 호안이 자신을 찾아 헤매도록 계기를 부여한 후 관계에 이른다. 조금 의심스러운 지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분들이 여전히 카트린느 브레야의 관점이 여성에게 있음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 아무리 비전문배우라고 해도 기본이 안 되는 연기로 인해 몰입에 방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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