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알렌의 영화들에서 ‘환상’은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해 왔습니다. 이는 현실에 대한 반대 급부로서 대개 고달프거나 무료한 일상에 대한 한시적인 일탈로서 기능했죠. <카이로의 붉은 장미>에서 여주인공은 스크린 속의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환상 속에서 현실의 무게를 덜어냈고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에서는 여행이라는 환상 속에서 바르셀로나로 비견되는 안토니오와 마리아와의 비현실적인 만남을 겪게 되지요. 심지어 <You will meet a tall dark stranger>의 한국 개봉 제목은 <환상의 그대>이기까지 하고 때때로 삶에는 신경안정제보다 환상이 필요하다는 마지막 대사로 영화를 마무리합니다.
뉴욕에서 벗어나 유럽 도시를 카메라에 담고 있는 우디 알렌은 런던, 바르셀로나에 이어 파리를 다음 목적지로 선택했습니다. (현재 로마까지 접수한 후 다음 목적지는 코펜하겐이 될 것이라고 하네요.) 파리라는 도시가 가진 이미지와 환상의 속성은 너무나도 잘 맞아 보입니다. 파리를 정의하는 수많은 수식어들, 파리하면 떠오르는 일정한 이미지들은 현실에서 벗어나 잠시 동안이나마 꿈같은 시간을 보내기에 더없이 적합한 장소이지요. 수많은 예술가들이 혼을 불태운 그 곳에서 갓 구운 바게트를 손에 집고 샹송을 들으며 센 강변을 걷거나 공원에 앉아 책을 읽는 그 순간은 누구에게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시간으로 다가 올 것입니다. 그저 여행객으로 파리에 와서 ‘파리지엥’ 코스프레를 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 순간은 다시 돌아올 지 알 수 없기에 더욱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이겠지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우디 알렌은 작정이라도 한 듯 관객들이 파리에 대해 기대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보여 줍니다. 남자 주인공 길이 밤 12시가 되면 마차를 타고 1920년대로 돌아가는 이야기는 파리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작가를 꿈꾸는 주인공이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스콧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T.S. 엘리엇 등의 대 문호들을 만나고 거트루드 슈타인에게 자신의 글을 보여 콜 포터의 음악을 듣고 주며 피카소, 다리, 루이스 브뉘엘, 만 레이 등의 예술가들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설정은 예술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혹할 만한 상황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낭만 속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만난다면 금상첨화이겠지요. 남자주인공에게 있어 이와 같은 환상은 세속적인 현실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낭만이 있기에 더욱 아름답고 빛나 보입니다.
환상이 아름다운 것은 현실 속에 부재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더없이 짧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 슬픈 것이기도 하지요. 결국은 환상에서 벗어나야 하는 시간이 찾아오고 현실로 돌아올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제시한 영화들을 생각해 보면, <카이로의 붉은 장미>의 여주인공은 영화 속 남자주인공과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비키 크리스나 바르셀로나>에서 비키와 크리스티나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서 무기력하고 멍한 표정을 지우지 못합니다. <환상의 그대>에서는 인간의 삶에서는 환상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그것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처방은 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내포하고 있지요.
하지만 이 영화는 ‘환상’에 대해 조금은 너그러우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취한다는 점에서 앞의 영화들과는 다른 행보를 취합니다. 관객들이 예상한 것처럼 주인공은 현실로 돌아오지만 그 현실은 환상에 빠지지 전의 현실과는 사뭇 다른, 주인공이 꿈꿔 왔던 현실을 이루게 된 것이지요. 이는 단순한 공간의 이동을 넘어, 주인공이 가져 왔던 환상, 그리고 그 환상이 주는 낭만을 현실에서도 찾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전 영화에서는 주인공들이 환상과 현실의 단절을 겪었다면 이 영화에서는 환상이 현실 속에서 내재화되었고 주인공은 환상이 곁들여진 현실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숱하게 들어왔던 ‘현재(present)는 선물(present)이다’라는 말을 뜻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 자체로서만의 시간이 아닌, 현실 속에서 환상을 찾고 그 환상을 통해 현재가 행복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1920년대를 유영하면서 행복의 감회에 젖어 있던 길이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화 속에서도 말했듯이 진정으로 행복하고 낭만적인 순간은 현실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길은 1920년대의 낭만에 빠져 있지만 1920년대에 만난 아름다운 여인 아드리아나는 그녀가 살고 있는 그 순간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일컫는 ‘벨 에포크’를 동경하죠. 그녀가 의상디자인을 공부한다는 점에 미루어 볼 때, 새로운 경향의 패션이 유행했던 시대에 설레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정작 ‘벨 에포크’ 시대의 예술가들은 르네상스 시대가 최고의 시대였다고 말합니다. 이를 통해 길은 벨 에포크 시대에 남기를 원하는 아드리아나에게 자신이 그 동안 낭만에 빠져 있었고 현실에 만족하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녀와의 이별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그의 깨달음에는 “현실의 소중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깨달음도 함께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길은 21세기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직접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자신이 살아왔던 시기 이전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시대는 지속될 수 없고 다른 시대에 그 자리를 물러 주어야 하며 이미 일어났던 과거는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 아드리아나는 1920년대 사람이기에 1930년대 말에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녀의 스승이었던 코코 샤넬이 나치 군과의 열애로 종전 후 숱한 비난에 시달리게 될 것이며 냉전시대로 인한 불안한 시기에 접어들게 되리라는 점을 전혀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녀가 그렇게도 경외하던 “벨 에포크” 시대는 어떤가요? 사실 벨 에포크라는 이름도 당시 시대의 사람들이 아니라 후대의 사람들이 붙여 준 이름입니다. 그것도 1910년부터 프랑스가 국제적인 위상을 조금씩 잃어갈 때 과거를 그리워하는 뜻에서 명명한 것이지요. 이처럼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과거의 시간들은 우리가 직접 겪은 것이 아니기에 완전한 객관성을 가지고 바라보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과거의 추억은 어떻게든 미화되고, E.H. 카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함으로써 과거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것이지요.
인간의 삶에서 과거, 현재, 미래는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과거를 통해 현실을 반추하면서 추억을 통해 현실을 위로하고, 현재의 시간에서 삶을 지속하고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며 아직 다가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는 불안함과 설렘을 동시에 느끼곤 합니다. 누군가의 삶에는 현재가 지배하는 반면, 누군가는 과거의 지배 속에서 현실을 살아 가거나 미래만을 바라보며 현실을 살아가곤 하지요. 하지만 이 세 가지 속성의 비중이 얼마나 차지하는 가에는 관계없이, 어쨌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인생은 ‘현재’이고 이러한 시간의 테두리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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