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무미건조하게 현실의 비극을 관조하다.. ★★★★
스위스의 알프스 스키장 아랫마을에서 부모 없이 누나 루이(레아 세이두)와 살고 있는 12살 소년 시몽(케이시 모텟 클레인)은 생활능력이 없는 누나를 대신해 도둑질로 가계를 유지해 나간다. 바로 알프스 스키장에 놀러온 손님들의 스키 용품을 훔쳐 파는 것. 무능력한데다 책임감까지 없는 누나 루이는 항상 시몽에게 손을 벌려 받은 돈으로 며칠씩 남자친구와 사라지곤 하지만, 어린 시몽은 언제나 누나가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영화 <시스터>의 배경이 되는 하얀 설원으로 둘러싸인 알프스 스키장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알프스라는 이미지와는 상반된 공간이다. 이곳은 유한계급이 휴가를 보내기 위해 찾아오는 유흥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시몽을 포함한 무한계급이 무엇을 하든 먹고 살아가야 하는 처절한 생존의 공간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 공간을 계급구조와 동일한 수직구조라는 이미지로 축조해 놓고 있다. 바로 유한계급들이 알프스 스키장이라고 하는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면, 시몽을 포함한 가난한 민중들은 스키장 아래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시몽은 어디 사냐는 질문에 ‘저 아래에 산다’고 답한다. 심지어 시몽의 누나는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스키장에 오르지 않는다. 이곳은 아무나 오를 수 없는 그런 곳인 것이다. (그곳에 사는 주민들조차)
<시스터>에는 확실히 다르덴 형제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다르덴 형제와 위르실라 메이에 감독이 어떤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지독한 리얼리즘, 역경과 고난으로 둘러싸인 환경, 그것을 극복하려는 주인공의 몸부림, 철저하게 한 인물의 시각, 감각, 심리에 초점을 맞춘 구성, 끝내 가슴 한켠이 허물어 내리는 듯 시린 느낌까지. 특히 주제라든가 구성에서 <자전거를 탄 소년>이 떠오르는 건 아마 누구에게나 비슷한 경험일 것이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소년이 먹고 살기 위해, 그리고 자신과 누나로 구성되어 있는 가족의 유지를 위해 고작 12살이라는 나이로 도둑질을 일삼지만, 그 어떤 어른도 소년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여기에서 어른은 사회=국가=시스템인 것이다. 어른들은 시몽을 도와주지도, 경찰에 인계하지도, 복지재단에 연락하지도 않는다. 어른들은 그저 방관하거나 심지어 소년을 이용해 이득을 챙기려 한다. 소년이 그토록 바랐던 구원의 상징인 크리스틴(질리안 앤더슨)조차 소년의 실체를 알고 난 뒤 차갑고 냉정하게 선을 긋는다. 고난은 아이를 빨리 성장하게 한다고, 시몽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나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면 12살 소년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하려는 태도엔 아마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터득한 이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 배어 있을 터이다. 아, 이 소년에겐 복지를 허하라.
다시 강조하지만 이 영화는 너무 무심하게 현실의 비극을 관조한다. 소년의 비극을 생각하면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무심하다. 그런데 소년의 비극엔 그저 경제적 어려움만이 자리 잡고 있는 건 아니다. 왜 영화의 제목이 <시스터>일까? 중반까지 누나 루이의 출연 장면이 많은 것도 아니고 비중이 높은 것도 아닌데 왜 <시스터>일까? 진실은 어느 순간 관객의 뒤통수를 툭 친다. 그렇다. 진실은 드라마틱하게 다가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마치 항상 옆에 있었다는 듯 툭하고 던져진다. 비로소 시몽이 어떻게 자랐고, 왜 지금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지, 소년이 진정 갈구하는 것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던져진 것이다.
바로 이 장면이야말로 왜 이토록 무미건조한 리얼리즘 영화를 묘한 긴장감이 지배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소년은 어떤 파국을 거쳐 결말에서 드디어 자신이 바라던 것을 손에 넣은 듯 보이기는 한다. 갑작스럽지만 아름다운, 그러면서도 가슴 시린 결말. 소년은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소년은 진정 행복해질 것인가? 이 영화의 결말은 해피엔딩인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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