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 어떤 지도자를 원하는가... ★★★☆
광해군은 조선 제15대 왕으로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북으로 도망갔을 때, 세자의 자격으로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지휘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운 일종의 스타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오히려 선조의 미움을 받아 즉위할 때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고, 결국 서인세력의 쿠데타로 폐위당해 연산군과 함께 조선 27대 국왕 중 유이하게 왕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대군으로 격하된 비운의 국왕이다.
어릴 때까지만 해도 광해군은 연산군과 함께 나쁜 왕(?)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했던 광해군이 어떤 시점부터인가 대동법을 실시하고, 명청 교체기에 조선의 국익을 위해 등거리 외교, 중립외교를 펼친 능력 있는 지도자로 부상했다. 이것이 광해군에 대한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기존 자료의 재해석에 따른 결과인지, 아니면 국민이 원하는 지도자 상이 바뀌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치적 목적에 의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분명한 건 광해군이 계속 집권했다면 아마 병자호란, 정묘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아무튼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에 의하면 광해군(이병헌)이 독살음모로 15일 동안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이를 대신해 왕 노릇을 한 광대가 있었으며, 바로 광해군의 대표적 선정인 대동법 실시와 명청 등거리 외교는 광해군을 대리한 광대의 치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상상력은 좋지만 말은 안 되는 얘기다. 그리고 좋은 이야기인지도 잘 모르겠다. 만약 광해군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억울해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수백 년 동안 폭군이라는 멍에를 써오다가 백성을 위한 개혁군주라는 재평가를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평가마저 자신과 닮은 누군가의 공으로 넘어간다니 말이다. 그럼에도 영화로만 보면 대중영화로서의 기본적인 재미와 감동, 교훈을 만끽할 수 있다. 최근에 본 한국 대중영화 중 가장 재밌다는 생각이다.
우선 코미디 감각이 뛰어나다. 억지로 웃기려 들지 않지만, 시종일관 깨알 같은 재미가 영화 속에 가득하다. 특히 중반부까지는. 대부분의 코미디는 왕으로 분한 광대의 몸짓과 말투, 그리고 허균(류승룡)과의 조화에서 시도되고, 성공률도 높은 편이다. 높은 성공률의 원천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에 빚을 지고 있다. 그럼에도 영화가 가장 많이 기대고 있는 지점은 코미디보다는 일종의 바램이다. 어떤 정치 지도자가 필요한가에 대한 백성의 바램.
<광해>는 백성들의 삶을 경험을 통해 이해하고 그들의 고충을 헤아리는 지도자가 훌륭한 지도자가 아닐까 라는 이야기를 한다. 실제로 그런지는(서민 출신이 서민을 위한 정책을 만들어내는 훌륭한 정치인이 되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임금 노릇을 하는 하선이 사월이(심은경)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흘릴 때, 우리 시대가 원하는 지도자란 어떤 지도자인가에 대한 상은 뚜렷하게 제시되는 편이다. 그건 바로 서민과의 공감 능력 아닐까 하는 것이다. 또는 소통.
그런데 <광해>는 공감 차원을 넘어서서 어떻게 보면 과도할 정도로 목적의식을 강조한다. 특히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군대를 파병하는 과정에서 하선이 보여주는 주장은 돌출적으로 튀어나온 듯 느껴진다. 목적의식을 강조하는 게 안 좋다는 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자연스럽게 도출되느냐의 문제인데, 이 지점에서 걸리는 건 도대체 하선이란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린 그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생각을 가진 인물인지를 전혀 모른다. 그런 그가 15살 소녀를 위해 마음 아파하고, 하루 만에 대동법을 공부해 쟁쟁한 대신들과 논쟁을 벌이고, 심지어 복잡한 외교문제까지 해답을 내 놓는다. 그럼에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관객은 하선을 모른다. 이 간극은 영화에 대한 느낌을 모호한 지점으로 몰아간다. 재미는 있는 데 뭔가 해소되지 않는 찝찝함이랄까. 이러한 느낌을 감독이 의도한 것이라면 이 영화는 의외로 정교한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 이병헌의 연기는 대체로 좋다. 그런데 초반의 광대 연기는 어색하다.
※ <광해>를 보면서 기시감에 시달려야 했다. 어디서 많이 본 영화라는 느낌. 나중에 찾아보고서야 <데이브>란 영화를 떠올렸음을 알게 됐다. 두 영화는 아내와의 로맨스를 끌어들이는 등 많은 지점에서 비슷하다. 어떻게 보면 <광해>는 <데이브>의 조선시대 버전 같기도 하다.
※ 너무 깔끔한 게 이 영화의 흠일지도 모른다. 너무 깔끔하게 떨어지다 보니 영화에서 위기의식, 긴장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주인공에게 위기가 닥쳐도 별로 걱정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실제 역사를 알고 있어서 그런 거 같지는 않다. 반면에 같은 이유로 편안하게 감상하기엔 좋다.
※ 최근 대형 투자 영화가 흥행에 연달아 실패한 CJ가 <광해>의 시사회 반응이 좋자 개봉일자까지 당기며 흥행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천만 이상을 노려본다는 얘기도 흘러나오는데, 작품 자체의 힘만으로 벅차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 천만 이상 영화 중 작품의 힘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하는 영화는 <왕의 남자>. 다른 천만 이상 영화들은 상영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나 이슈를 타고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다. <광해>도 이런 점에서 긍정적인 전망은 가능하다. 어쨌거나 최소한 실망을 주는 작품은 아니며 다루는 주제가 대선을 앞두고 아주 시의적절하기 때문이다. 만약 <광해>가 천만을 넘는다면 사극으로서는 <왕의 남자>에 이어 두 번째이며, 두 작품은 모두 조선 국왕 중 유이하게 국왕의 지위를 박탈당한 비련의 주인공을 모델로 했다는 묘한 공통점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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