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에 드리운 디즈니의 그림자... ★★★
한 때 픽사 애니메이션은 나오기 무섭게 무조건적인 환호와 호평의 대상이었고, 걸작의 반열에 올랐던 시절이 있었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이하 <메리다>)은 그런 시절을 돌이켜볼 때, 매우 아쉽게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느낌은 <메리다>가 픽사의 작품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메리다>는 픽사 최초의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다. 스코틀랜드 공주인 메리다는 어릴 때부터 활쏘기를 좋아하는 말괄량이 공주다. 그러나 엄마인 왕비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얌전한 공주로 만들기 위해 사사건건 참견을 하고 통제를 하려든다. 왕국의 안위를 위한 정략결혼 추진에 반발한 공주는 엄마와 크게 싸운 후 숲을 헤매다 마녀를 만나게 되고, 엄마를 바꾸는 약을 구한다. 그러나 엄마의 마음을 바꾸는 것으로 알았던 약은 엄마를 곰으로 바꾸게 하고, 이 곰을 사냥하려는 아빠와 부족 남자들에 맞서 메리다는 엄마를 지켜내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테이큰 2>에 이어 이 영화에서도 우려가 현실로 등장했다는 얘기를 해야 될 것 같다. 무슨 우려냐면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했을 때의 우려를 말한다. 공주, 왕자, 해피엔딩 등 전통적인 애니메이션에 치중하는 디즈니와 달리 픽사의 주인공들은 소외, 그늘이라는 단어와 잘 어울리는 주인공들이라는 심오한 차이가 있었다. 물론 픽사는 노골적으로 디즈니나 전통동화 속 이야기들을 비틀고 꼬집는 드림웍스와는 확연히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디즈니가 전통만 부여잡고 제 자리에 멈춰 서 있는 것도 아니다. <마법에 걸린 사랑>을 보면 최소한 디즈니도 자신들을 유머의 대상으로 삼을 정도의 융통성은 있으며, 픽사의 인수도 어쩌면 이 연장선상에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럼에도 <메리다>라는 전형적인 프린세스 스토리의 애니메이션이 픽사의 이름으로 등장했을 때, 이건 분명히 디즈니의 색깔이 덧입혀진 것이라는 심증을 굳히게 하는 반면 아름다움보다는 옹골차 보이는 메리다의 외모는 디즈니 애니메이션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몇 년 전 드림웍스가 <드래곤 길들이기>를 내놨을 때 좀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건 픽사가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의 깊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드림웍스가 픽사를 닮으려 노력하는 것인가? 그런데 <메리다>는 묘하게 픽사보다는 드림웍스의 분위기가 풍긴다. 그러니깐 <메리다>는 디즈니가 픽사와 손잡고 만든 게 아니라 마치 디즈니가 드림웍스가 손을 잡고 만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메리다>는 스코틀랜드의 공주를 내세우고 있지만, 거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왕국의 흥망이 걸려 있는 얘기도 아니며, 디즈니 식의 아기자기한 멜로가 개입해 들어오지도 않는다. 액션도 소박해 몇 번의 활쏘기 외에는 액션이랄 것 자체도 없다. 대신에 영화가 주목하는 건 왕비와 공주, 엄마와 딸의 세밀한 감정의 흐름과 교감이다. 특히 곰으로 변신한 후에도 여전히 왕비로서의 행동을 보여주는 엄마의 모습은 크지는 않지만 정다운 웃음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분명 전형적 프린세스 스토리지만, 이런 점에선 여전히 픽사의 저력이 묻어난다고나 할까. 또는 픽사라는 이름의 자존심.
※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간 후에 쿠키 영상이 나온다. 대부분의 관객의 그 전에 퇴장한다는 안타까움이.
※ <메리다> 전에 등장하는 단편 애니메이션 제목은 <라 루나 La Luna>이다. 이 단편이야말로 여전히 픽사의 미래에 희망이 있음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