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도는 부실한데, 건물은 잘 빠졌다... ★★★☆
현재인 2012년에서 생각해보자면, 30년 동안 대체 뭔 일이 있었기에 2044년 <루퍼>가 그리는 근미래는 이토록 디스토피아적 세계가 되었을까. 2074년에는 대체 30년 사이에 무슨 일이 또 있었기에 타임머신을 만들 정도의 혁명적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매일같이 처리(!)해야 할 사람들이 끊임없이 과거로 보내지는 것일까? 모든 사람들에게 추적 장치가 달려 있어 시체 처리가 어렵기 때문에 과거로 보낸다는 것인데, 2044년의 현실을 보건데 미래의 공권력이 힘을 되찾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고 보기에도 어렵고, 그렇다면 일개 범죄조직이 죽여야 할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이 끊임없이 발견(?)된다는 설정도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물론,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설정은 굳이 사람을 죽이기 위해 킬러를 고용한다는 점이다. 2074년의 사회가 어떠한지 구체적으로 묘사된 바가 없으니 정말로 사람을 죽이기 위해 타임머신을 이용, 과거로 보낼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치자. 그리고 조직 간의 치열한 암투로 죽일 사람이 많이 생겼다고도 그냥 이해해보자. 그런데, 과거로 돌아간 조직원이 킬러를 고용하는 대신에 용광로를 하나 확보해서, 바로 그 용광로를 미래에서 도착하는 장소로 설정해 놓으면 킬러를 고용하지도 않고, 굳이 다른 비용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태평양 한 가운데나 남극의 한 가운데는 어떨까?
아무튼, 영화 <루퍼>는 이렇게 주장한다. 미래의 조직은 처리해야 할 사람을 과거로 보내고 루퍼는 처리하는 대가로 은괴를 획득한다. 그러나 모든 루퍼는 언젠가는 미래에서 온 자신을 처리해야 할 운명에 처한다. 바로 ‘계약해지’. 자신을 처리하면 금괴를 받고 남은 30년을 즐기다 최후를 맞이한다. 그런데 미래에서 온 조(브루스 윌리스)는 현재의 루퍼 조(조셉 고든 래빗)를 제압한 후 도망가 버린다. 조에 의하면, 30년 후의 미래에 레인메이커라는 악당이 등장해 루퍼들을 모조리 죽이고 있다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사랑하는 아내까지 죽었다는 것이다. 미래의 조는 어린 레인메이커를 찾아내 자신에게 닥칠 비극적인 미래를 바꾸려고 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시간여행을 다루는 이 영화의 기본 설계도는 그렇게 훌륭하다고 보기 어렵다. 처음에 들을 때는 대단히 새롭고 신선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빈틈이 너무 많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시간여행 영화 중 특히 자신이 과거나 미래의 자신을 만나게 되는 영화는 왠지 더 공감하지 못하는 편이다. 과거의 자신을 만나고 뭔가 일을 도모한다면, 이미 미래의 자신은 과거에 미래에서 온 자신과 만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과거에서 뭔가를 했기 때문에 미래는 바뀐다??? 다른 걸 떠나 1초 후의 자신이 있고, 1초 전의 자신이 있으며, 이런 무수한 자신들이 별개의 육체를 가지는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하면 우주에는 수많은 내 자신이 수많은 시간 단위로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내 머릿속에선 이런 세계가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루퍼>라는 영화를 보게 된 이유는 전적으로 감독의 전작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브릭>과 <블룸형제 사기단>을 만든 감독이라면 최소한 어처구니없는 망작을 내 놓지는 않았을 거라는 믿음.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믿음은 적중했다.
기본적인 설정이 새롭고 신선함에도 불구하고 영 별로인 영화를 만날 때가 있다. 그런 영화들의 문제는 대체로 설정에서 그대로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신선한 설정만 믿고 더 이상 나아가지 않은 것이다. 게으른 영화들. 최근에 <링컨 : 뱀파이어 헌터>가 그러했다. ‘링컨은 뱀파이어 헌터였다’ 영화는 결국 이 얘기, 가장 기본적인 설정만 얘기하고는 끝내버린다. <회사원>,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는 킬러들의 얘기. 직접 안 봐서 뭐라 얘기하기 곤란하지만, 여러 평가를 보건데 이 영화 역시 거기에서 멈춘 것 같다. 더군다나 <회사원>의 설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전혀 새롭지 않다. 2005년에 나온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만 해도 <회사원>과 동일한 설정 아니던가.
어쨌거나 <루퍼>는 기본적인 설정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 내 달리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일종의 밑밥처럼 던져지는 염력이라는 초능력이 시간여행과 함께 별개의 이야기를 만들면서 후반부에 들어와 중요한 요소로 사용되는 거라든지,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활용해 다른 이야기를 꾸준히 만들어 내면서 이야기의 흐름에 탄력을 부여하는 등의 매우 영리한 영화임에 분명하다. 거기에 매력적인 소재를 활용한 볼거리 중심의 SF 액션영화가 아닐까 하는 예상을 깨고, 최소한 영화가 제시하는 규칙을 깨지 않는 탄탄한 구조의 이야기와 후반부에서의 감정선이 살아 있어 관객의 마음을 흔들기까지 하는, 한마디로 시간여행을 다룬 수작이라고 할만하다.
비록 액션장면이 많지는 않지만, 짧은 만큼 강렬하며 미래의 세스가 죽는 장면에서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는 특히 시각적 매력을 발산한다.(말은 되지 않는다. 과거의 인물이 발목이 잘린다면 미래의 인물이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지 않으리라. 어쨌거나 과거가 변하면서 그 변화의 결과가 과거로 돌아와 있는 미래의 인물에게 그대로 나타난다는 건 매우 매력적인 이미지이긴 하다) 오히려 영화가 더 어두워지고 더 암울해지고 더 잔인해졌다면, 그리고 초능력 장면에서의 호러적 느낌을 더 강화했다면 <루퍼>는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영화의 새로운 마스터피스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으로서도 충분히 재밌지만 말이다.
※ 브루스 윌리스의 말투와 표정을 흉내 내는 조셉 고든 래빗의 연기는 꽤 흥미롭지만, 굳이 분장까지 비슷하게 하고 나오는 건 뭔가 모르게 조금 거슬렸다.
※ 브루스 윌리스, 조셉 고든 래빗 외의 출연 인물에 대한 정보를 모르고 영화를 보았다. 초반 폴 다노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이어 등장한 에밀리 블런트, <루퍼>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연기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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