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당신은 이 이야기를 믿습니까? ★★★★☆
기본적인 스토리를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개봉하기 전에 읽기 위해 사두었던 원작을 읽지 못한 채 영화를 먼저 보게 되었다.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해 작은 구명보트에 같이 있게 된 인간과 호랑이의 이야기. 드넓은 태평양의 망망대해, 그것도 인간 한 명에 말 못하는 호랑이 한 마리가 해쳐나가는 단순한 구도에서 과연 어떤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인가? 아니 그 전에 2시간이 넘는 영화가 과연 짜임새 있는 결과물로 선보일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
그러나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126분간 내가 본 건 실로 아름다운 경이로움의 연속이었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초반부터 강렬한 영상 체험(!)으로 내 눈을 사로잡아 버리고 말았다. 프랑스의 수영장, 눈이 시리도록 파란 물과 하늘, 그 속을 마치 날아가듯 헤엄치는 장면(처음 경험하는 앵글)은 영화라는 매체가 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선물이라고 확신한다. 물론 파이가 망망대해에서 겪는 고통과는 유리된 듯한 아름다운 바다(그리고 바다에서 보는 생물들과 사건들) 역시 환상적이다. 아마도 이 영화는 영상만으로 볼 때 내가 본 그 어떤 영화보다 아름다운 영화일 것이다.(가급적 아이맥스 3D로 보길 권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초반부 파이가 성장하면서 인도를 떠나기까지와 현재의 파이가 작가에게 이야기하는 장면 외에 거의 대부분은 파이와 뱅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작은 구명보트에 의지해 태평양을 건너는 장면이다. 그런데 놀라운 건 이 장면에서 배와 인간인 파이를 제외하고는 거의 가짜라는 점이다. 가짜 바다, 가짜 하늘, 가짜 호랑이, 가짜 고래, 가짜 폭풍, 가짜 돌고래, 가짜 미어캣. 그러니깐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아바타>보다 더 CG 분량이 많으며 더 진화된 CG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진화되었다는 건, <아바타>가 가짜 티가 너무 확연했다면 <라이프 오브 파이>는 CG라는 사실을 알고 보는 데도 실사에 버금가는 질감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며, 심지어 의도적으로 가짜 티를 낸 장면은 누구말대로 환각상태(경험해보진 않았지만)에서나 경험해봄직한 황홀경으로 채색되어 있다.
더욱 놀라운 건 영상만이 아니라 영상에 녹아든 이야기 역시 우리의 마음을 흔든다는 점이다. 가끔은 생존에 대한 분투보다는 신에 대한 질문에 비중을 드느라 거의 살아남는다는 게 불가능한 망망대해에서의 역경이 별로 힘들어 보이지는 않는다는 문제가 있지만, 시종일관 리드미컬하게 진행되는 이야기며, 특히 마지막에 작가와의 대화로 드러나는 또 하나의 숨겨진 이야기는 화룡점정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놀라우며 경이롭다. 사실, 두 번째 이야기에 방점을 두고 재해석을 해보면 <라이프 오브 파이>는 어느 호러영화 버금갈만한 무서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현실의 참혹함을 판타지로 극복해 내는 건, 무섭고도 아름다운 경험이다.
종교인과는 논리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고들 한다. 이건 종교를 비판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종교는 비논리적이며, 따라서 입증의 대상이 아니라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신부가 논리적으로 따지는 파이에게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해 자신의 아들 예수를 보냈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얘기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도 결국 같은 얘기를 하는 건 아닐까 한다. 종교, 신은 믿음의 영역에 있는 존재라는 사실. 첫 번째 이야기가 끝났을 때 작가의 당황한 얼굴 표정이 바로 논리로 종교를 대하는 사람들의 심정일 것이다. “아니, 어떻게 이런 비논리적 얘기를 믿는 거지?”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그게 바로 종교다’ 작가 역시 현실적이지만 참혹한 두 번째 얘기보다는 비현실적이지만 판타지에 가까운 첫 번째 얘기를 믿는다.(고 말한다) 그게 바로 현실의 아픔을 극복하는 종교(판타지)의 역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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