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리를 비우고 눈이 가는대로 즐긴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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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K Soul's FILM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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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부터 영화의 흥행은 예견된 일이었다. 전작 [부당거래]로 작품성과 흥행성에서 평단과 관객의 대대적인 호응을 끌어낸 류승완 감독의 연출과 각본, 가장 ‘핫’하다는 충무로의 간판 ‘먹방’ 배우 하정우, 어떤 영화에서든지 자기 몫을 철저히 해내는 한석규, 류승범 그리고 영화 [도둑들]로 화려하게 부활한 전지현까지. 영화 [베를린]을 기다려온 관객은 이들 모두를 한 영화에서 만날 수 있다는 환희에 젖어 영화관으로 향한다. 마땅히 예견은 현실이 됐다. [베를린]은 개봉일인 30일 이후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줄곧 고수하고 전국 관객수 300만 돌파를 앞에 둔 채 흥행의 가속을 붙이고 있다.
음모가 도사리는 도시 베를린. 국정원 요원 정진수(한석규)는 불법무기거래장소를 감찰하던 중 국적불명, 신원 미상의 ‘고스트’ 표종성(하정우)을 알게 된다. 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그를 쫓던 정진수는 그 배후에 존재한 음모에 관심을 갖게 되고 상황은 여러 나라의 감찰조직, 테러조직과 맞물리며 복잡하게 전개된다. 한편 표종성을 제거할 목적으로 베를린의 온 동명수(류승범)는 표종성의 아내 련정희(전지현)를 이용해 함정을 파고 그를 죽일 계획을 세운다. 괴물 같은 사회의 영웅에서 단숨에 쫓기는 신세로 전락한 표종성과 련정희는 갖가지 위협이 도사리는 베를린에서 서로에게 의지한 채 추적을 피하려 애쓴다.
영화 초반관심이 막강하다면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할 수 있다. 바로 ‘작품의 완성도’. 영화 [베를린]은 류승완 감독을 비롯한 주연 배우 모두에게 부담 가득한 ‘모험’이다. 그래서 [베를린]에는 만든 사람 모두의 ‘불꽃 의지’가 보인다. 전작의 영예를 뛰어넘고 말겠다는 불굴의 의지. 류승완 감독은 말의 향연으로 불리는 [부당거래]를 뒤로 하고 몸의 향연인 그의 본류 장르 ‘액션’으로 귀환했다. 배우 하정우 또한 작년 출연한 작품마다 대박을 일궈냈던 역사를 뒤로 하고 [베를린]을 통해 ‘첩보 액션’에 도전했다. 한석규, 류승범, 전지현 역시 이전 작품에서의 모습을 뛰어넘겠다는 의지를 영화 곳곳에 내비쳤다.
그래서일까? 영화 초반부는 ‘잘 해보겠다’는 의지가 욕망의 늪에서 허우적댄다. 모두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있다. 영화도, 연출도, 배우의 연기도. 얽히고설킨 복잡한 스토리가 관객의 두뇌를 쉼 없이 헤집어 놓고 기대보다 많은 수의 캐릭터가 혼재하며 이에 따라 관객은 집중력을 잃는다. 관객이 머릿속에서 캐릭터와 이야기의 널브러진 퍼즐을 맞추는 사이 스크린에서는 눈과 귀를 압박해오는 파괴적 액션이 복잡한 두뇌회전을 지속적으로 방해한다. 그러니까 관객은 이야기를 이해할 틈 없이 퍼부어대는 액션에 넋 놓고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눈과 귀는 즐겁지만 두뇌는 찜찜한 상태. 이때부터 이야기를 읽기보다 분위기를 읽게 된다.
[베를린]을 본 관객의 호불호가 분명히 갈리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초반의 난해하고 지루한 이야기 전개를 읽지 못하거나 읽을 의지가 사라지면 후반 액션도 크게 와 닿지 않는 것. 속이 꼬여버린 관객은 [베를린]이 멋만 잔뜩 부린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보다는 스타일
에 지나치게 치중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연극에는 방백이라 불리는 대사가 있다. 방백이란 등장인물이 말을 하지만 무대 위의 다른 인물에게는 들리지 않고 관객만 들을 수 있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는 대사를 의미한다. [베를린]의 난해한 이야기가 전달력을 잃은 부분은 대사와 방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은 데서 기인한다. 잘 편집된 몽타주 화면에 방백 내레이션 몇 번만 넣어주었어도, 정진수(한석규)와 표종성(하정우) 또는 표종성(하정우)과 동명수(류승범)가 상황에 관한 대화를 조금만 더 주고 받았더라도 관객에게는 이야기를 이해하는 좋은 힌트가 되었을 것이다.
류승완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복잡한 이야기를 속도감 있게 밀어붙여도 요즘 한국 관객은 이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 관객의 수준을 높게 평가한 것은 기분 좋은 일이지만, 힌트는 조금씩 흘려야 하지 않았을까? [베를린]을 보고 가장 아쉬운 점은 이야기의 맥락만 이해한 탓에 관람 후까지 찜찜한 기분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베를린]은 분명 재밌고 잘 만든 영화다. ‘액션 키드’ 류승완 감독은 별명에 걸맞게 공간 활용 액션의 절정을 선사하고, 몸이 부서져라 부딪치고 뛴 하정우는 인간병기에 가까운 액션 히어로로 분한다. 정진수 역의 한석규는 [쉬리]의 ‘유중원’과 넘버3의 ‘태주’를 섞은 듯 한 반건달 국정원 요원 캐릭터를 선보이고, 동명수 역의 류승범과 련정희 역의 전지현 역시 기대 이상의 호연을 펼친다.
[베를린]은 확실히 후반부로 내달릴수록 흥미진진하다. 남북 분단, 이념과 체제의 흔한 소재를 갖다 쓰면서 정작 [베를린]이 이야기하는 것은 괴물 같은 사회가 만들어 낸 한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 체제안의 혼란, 굴절된 배신이다. 돈들인 액션신은 값어치를 충분히 해내고 두 팔, 두 다리로 표현하는 물리적 액션신도 주변 공간과 소재 활용이 덧칠되며 기존 한국 액션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스케일과 디테일을 담는다. 최고의 조합이 항상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없지만 이만하면 ‘진수성찬’. 발품과 시간이 아깝지는 않다.
영화의 마지막, 마치 속편을 예견하는 듯 한 하정우의 대사 ‘블라디보스토크, 원 웨이!’는 표종성(하정우)과 동중호(명계남)의 제 2의 대결의 신호탐처럼 진한 여운을 남긴다. 류승완 감독은 속편을 생각하지 않고 결말을 만들었다고 말했지만, [베를린]이 굉장한 성공을 거둔다면 관객의 호응이 [베를린] 2편을 불러내지 않을까?
[베를린]의 속편은 [베를린]을 또 한 번 뛰어넘는 '값진 모험'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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