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속5센티미터 영화포스터에 적힌 문구,
어느정도의 속도로 살아가야,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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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봄은 몇 번이고 겨울의 마지막 문턱 앞에서 주춤거리다 온 것 같아요.
절기를 망각한 눈이 내릴 때도 있었지만, 그 사이에도 봄은 꽃을 품고 있었습니다.
화단에 움튼 꽃봉오리를 발견하고부터는 봄이 오는 모습을 포착하려고 주의를 기울였는데,
하룻밤 자고 나니 꽃이 이만큼씩 벌어져 있었던 것 같아요.
여러분도 봄이 부린 마술을 충분히 감상하셨는지 궁금하네요~^.^
오늘 소개할 영화는 이런저런 이유로 봄에 좀 더 젖어있고 싶은 분들을 위해 준비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초속 5센티미터’입니다.
봄, 첫사랑의 애상
영화의 도입부와 대사 /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1분여의 도입부에서 영화는 가장 중요한 첫사랑의 심상들을 따라가며 보여줍니다.
벚꽃이 흩날리는 동네의 모습, 따뜻하고 평화로운 봄의 분위기, 기억에 또렷이 박힌 어떤 대화,
어떤 장면들… 그리고 감독은 인물을 full shot보다는 뒷모습이나 옆모습, 살짝이 가리워진 앞모습 등으로 잡아냄으로써 어른어른 거리는 기억 속에 남아있는 첫사랑의 모습에 더 가까이 다가가죠.
건널목 이편에 타카키에게, 건널목 저편에서 아카리가 건넨 말을 뒤로하고 서로를 가리우며
그 사이를 지나가는 기차는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중요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서 잔잔한 음악과 함께 제1화의 제목이 스크린으로 떠오르는데요.
전 이 음악만 들어도 영화를 다 본 순간의 감흥이 밀려와 벌써부터 먹먹해 지곤 해요.^^
‘벚꽃 무리’- 타카키(좌)와 아카리(우)의 재회장면과
‘우주 비행사’ – 짝사랑의 열병을 앓는 카나에의 모습 /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이 영화는 62분의 러닝타임 동안 이어지는 세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화 ‘벚꽃 무리’에서는 한 초등학교에 차례로 전학을 온 타카키와 아카리가 단짝이 되어가는 모습과
졸업과 함께 아카리의 전학으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 재회하기까지의 과정을 교차해 보여줍니다.
어느 덧 아련한 그들의 첫사랑에 그리고 자기 자신의 추억에 녹아들게 되어요.
제2화 ‘우주 비행사’에서는 카나에의 시점에서 고등학생이 된 타카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좀처럼 감정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짝사랑의 아픔과 성장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마음을 돌리지 못하는 사랑에 빠져있는 카나에의 모습을 통해
아카리를 잊지 못하는 타카키의 마음도 느껴져 가슴이 저며옵니다.
제3화 ‘초속 5 센티미터’에서는 성인이 된 타카키의 일상으로 시작해,
타카키와 아카리가 지나온 시간들을 음악 속에 담아냅니다.
무채색의 도시, 진부한 일상의 파편들,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 속에서 어쩌면 간발의 차이로
스쳐지나 갔을지 모를 두 사람. 영화는 다시 그 건널목으로 향합니다.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말은 영화에서 확인하세요~^^
심리적인 속도, 초속5센티미터
영화의 도입부에서 아카리의 말을 통해 영화의 제목인 ‘초속 5센티미터’가 의미하는 것이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임을 알게 되지만, 이는 비단 벚꽃의 낙화 속도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제1화에서는 아카리가 보낸 편지 속 내용에 따라, 계절은 여름-가을-겨울로 빠르게 지나갑니다.
이번엔 타카키 마저 멀리 전학을 가게 되자, 둘은 만나기로 하죠.
그런데 둘의 재회를 가로막는 장애물 ‘눈’ 이 약속의 날 내립니다.
환승해야 하는 열차는 연착되고 그나마도 눈 때문에 역마다 몇 분씩은 정차합니다.
어렵게 재회하여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순간, 타카키의 나레이션이 나옵니다.
‘벚꽃 무리’ 타카키와 아카리의 재회장면, 나무에 쌓였던 눈은 그 봄날의 벚꽃과도 같죠. /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내내 아카리를 그리워하는 타카키에게 초속 5센티미터라는 속도는,
아카리와의 재회에 다가가는 속도 또는 아카리를 잊지 못해 잊어가는 심리적인 속도이기도 합니다.
영화 속에서 초속 5센티미터뿐만 아니라 ‘속도’는 인물들을 둘러싼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의 변화와
심리적 거리를 동시에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지막 화에서 타카키가 3년이나 사귄 여자에게 받은 ‘우리들은 분명 천 번이나 문자를 주고받았지만
아마, 마음은 1센티미터정도 밖에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라는 문자가 대표적이죠.
뿐만 아니라, 2화에서 초속 5센티미터는 우주 비행선의 속도 시속 5km와 대비되어
그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카나에가 차마 고백하지 못하고 타카키 앞에서 영문 모를 울음을 터뜨리던 순간 구체화되는데요.
갑자기 엄청난 굉음을 만들며 창공을 향해 날아가는 우주 비행선의 모습을 다각도로
점점 더 원거리에서 시각화하고 그 모습을 압도된 듯 멍하니 바라보는 두 인물을 비춤으로써,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물리적인 시간들과 강력한 세월의 힘을 드러냅니다.
시속 5km는 인물들이 살아내는 인생의 시간, 그리움 속에서 초속 5센티미터로 할 수 있는 것을
강박적으로 어떻게든 해내 가던 시간들이 축적되어 문득 되돌아보았을 때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르게
‘그대 없이’ 순식간에 흘러가버린 시간들에 대한 속도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더 손 닿을 수 없이 멀어져 버리고만,
운명이 떼어놓은 둘 사이의 거리에 대한 속도이기도 하지요.
‘우주 비행사’- 카나에의 눈에는 언제나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는 듯한 타카키입니다. /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이와 대비되어, 초속 5센티미터는 타카키에게는 그대도 나를 그리워하고 있노라고, 만나고 싶어하며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그 믿음에 대한, 언제 들을 수 있을지 모를 대답에 다가가는 속도입니다.
그리고 카나에에게는 바로 앞에 두고도 자신이 아닌 저 너머의 무언가에 시선이 머물러 있는 타카키에게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는 심리적 거리에 관한 속도이지요.
섬세하게 그려낸 미묘한 감정의 움직임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은 탁월한 영상미를 칭찬하기에 앞서, 흔하디흔한 첫사랑이란 소재,
단순한 스토리로도 흠뻑 첫사랑의 향수에 빠져들게 만든, 인물의 심리나 분위기에 대한
섬세한 묘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죠^^
가령, 환승 열차의 도착이 늦어지는 승강장에 (들려와야 할 열차가 다가온다는 알림 소리 대신) 울리는
전화벨소리로 시작된 회상을 통해 아카리의 전학을 알리던 통화에서 그때의 두 사람 사이의
장애물과 낙심했던 마음을 재회의 여정에 들이닥친 장애물과 점점 좌절해가는 타카키의 심정과
멋지게 연결하는가 하면, 정차한 역에서 추운 줄도 모르고 열차의 문을 열어둔 채 서 있었던 것을 통해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죠.
깜빡깜빡 흔들리며 켜져 있는 열차의 형광등조차도 인물의 감정을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벚꽃 무리’-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타카키와 눈이 내리는 벌판을
고독하게 달리는 열차의 모습만으로도 인물의 감정에 푹 빠져듭니다.
고생 끝에 만난 잠시의 시간 동안 모든 것을 털어내야 하는 그들이었기에, 그리웠다는 말보다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쏟아내던 대화는 어쩌면 그것이 그들이 매일을 누리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타카키의 칭찬에 수줍어하는 아카리의 모습을 앉은 자리에서 흔들리던 다리만 보여줌으로써
표현하는 것이나, 두 사람이 대합실 나오자 펼쳐진 눈이 내리던 밤의 정경은
벚꽃이 날리던 날을 회상하는 관객들의 마음까지도 그 고요한 밤으로 초대하죠.
‘우주 비행사’- 카나에가 고백하던 날 /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나란히 거리를 두고 서 있는 스쿠터는 마치 닮은 듯하지만 방향이 달라 마주보지 못한 사랑을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만 같고 시동이 갑자기 걸리지 않는 스쿠터는 시작도 못한 사랑,
쉽게 말을 꺼낼 수 없는 카나에의 고백과도 같습니다. 사랑 고백을 하려고 결심한 날,
카나에가 앞서가는 타카키의 옷자락을 잡는 장면은 이 영화의 심리 묘사의 백미이기도 합니다.^^
아련한 추억과 아날로그적 감성으로의 초대
1화에서 전학으로 떨어지게 된 두 사람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 상태에서 편지라는 형식을 통해
나레이션으로 애틋한 감정을 전달하고 있는데요. 영화는 두 사람의 풋풋한 사랑뿐만 아니라
실시간 의사소통의 시대에서 사라져간 ‘손 편지’라는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초대함과 동시에,
눈여겨본 적 없는 그러나 사라져가는 일상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복원해내고 있습니다.
급속도로 영화에 빠져들 수 밖에 없는 것은 빛이 쏟아지는 운동장, 수업 중인 교실로 복도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따뜻한 봄날의 햇살, 교복, 편지 등 일상의 모습들이
우리의 추억 속의 것과 닮거나 같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감독은 빛의 연금술사임을 증명하듯 사진을 찍어놓은 듯 한장 한장의 스틸컷을 감상하는 수준의
완성도 높은 영상미를 통해 우리를 아련한 추억 속 그 장소로, 그날의 햇살 속으로 데려다 놓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교실에서 공부하셨나요?^^ /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대부분의 애니메이션이 배경은 대충(?) 그리는 한이 있더라도 캐릭터의 묘사에 치중한다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독특하게도 캐릭터는 애니메이션다운 대신에 배경은 거의
‘세밀화’수준으로 묘사합니다.
영화 속에서 빛은 열차의 표면을 반사하며 구르고, 아스팔트 위에 아지랑이로 피어오르기도 하며,
사물의 전부가 아닌 일부를 낮은 각도에서 기울여져 비춤으로써 사물의 형체와 그림자를 통해
감추고 있던 사물의 속내를 드러내는 듯하죠.
이렇게 빛의 강약을 강조하고 배경을 정교하게 표현하는 이유에 대해 감독은
“아름다운 장면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살아가는 데 큰 격려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실사에 가까운 아름다운 장면들은 이 영화에서도 ‘초속 5센티미터’라는 심리적 속도에 맞춰
다소 정적인 움직임을 통해 아련한 감정을 고조시키고 있죠. 그가 묘사한 배경의 도움으로
추억은 아름답고 따뜻하기만 합니다.
실제로 2만여 장 이상의 스냅사진을 찍은 다음 사진을 바탕으로 작화를 했다고 합니다. *_*
아름다운 일상 /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디지털 세상 속에서,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지닌 이 영화를 보면서
이 봄날의 벚꽃 엔딩을 맞이해 보는 건 어떨까요? ^^
아름다운 봄날 누리시기를 바랄게요^^
( 사랑에대한 진실 : 설레임이 익숙함으로 변할때 : 우리도 사랑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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