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내리는 장마비에는 속수무책이다. 빗길은 걸어도 걸어도 지리하게 이어지고, 마음은 물을 먹어 질척거리는 신발만큼이나 무거워져 축 가라앉아버리기 일쑤이다. 무엇을 하고 싶다거나, 해야한다고 마음을 다잡기가 쉽지 않다. 그저 비가 흐려놓은 시야의 사각지대 그 어디론가 숨어들고만 싶다.
이 영화, 언어의 정원의 두 주인공도 비를 만난 사람들 같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단순한 기상현상으로서의 비가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의 비를 만난 사람들이다.
남자주인공 타카오는 구두직공을 꿈꾸지만, 고등학생인 그가 꿈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상상속의 막연한 영감을 스케치북에 끄적거리는 일 뿐이다. 자신이 맞게 가고 있는 건지, 무엇을 해야하는지도 잘 모르지만 끊임없이 그리고, 또 그려볼 뿐이다. 그의 꿈은 빗속 풍경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타카오는 비가 오는 날이면 1교시를 땡땡이 치고 공원으로 간다. 비로 둘러쳐진 천연요새에서 자신을 외부와 단절시킨 채 스케치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의 요새에, 아침부터 반듯한 정장을 입고 쵸콜릿을 안주삼아 맥주를 마시고 있는 이상한 여자(유키노)가 있다. 하루, 이틀... 비가 올때마다 약속이나 한듯 그런 묘한 마주침이 반복되고, 비의 요새를 공유한 그들은 어느새 자신의 꿈에 대해, 상처에 대해 서로에게 털어놓을 수 있게 된다.
이 영화는 성장에 관한 영화이고, 동시에 사랑에 관한 영화다. 하지만 엄청난 성취나 극적인 사랑에 대해 다루지는 않는다. 극중에서 타카노는 세상을 향해 좀처럼 발걸음을 떼기 두려운 유키노를 위해 구두를 만들기로 하고, 이를 통해 그 자신도 한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또 유키노는 유키노대로 타카노의 사랑을 통해 상처에서 구원되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내게된다. 외로운 빗속을 더디게 걸어가던 개인들이 상대방을 발견하면서, 서로를 성장시키는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유키노는 이제 구두가 없어도 어디든 갈 수 있는 삶의 체력이 생겼을 것이고, 타카노는 구두를 만들어야할 확실한 이유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그래서이 둘이 교재를 하게 된다거나, 남은 생을 함께 한다는 식상한 결말은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서로에게 영원히 소중하게 추억될 것이고, 그 기억은 앞으로도 그들이 살아가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 유리구두에 발을 구겨넣는 순간 재투성이에서 단순히 왕자의 아내로 역할을 갈아타는 신데렐라에 비하면 언어의 정원은 얼마나 고차원적이고 멋진 동화인지!
** 영화전반의 배경이 되는 비가 내리는 풍경은 스토리의 뼈대를 이룰 뿐더러, 그 자체로도 미학적으로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