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일 같지 않은 한 흑인 남자의 실화를 다룬 영화다.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처럼 자기 앞가림도 못 하는 어느 남자의 하루 산책에 대한 이야기와 같았다. 자기 주변의 누군가와의 우연한 만남과 그것을 통한 하루 느낌의 나열 정도? 영화 역시 하루를 시간으로 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하루, 한 사람의 전부를 말해준다. 영화 시작 부분에서 일관되지 않은 카메라의 초점으로부터 시작하는 이 영화에서, 그는 누구이고 그는 무엇을 하며, 그는 어떻게 됐는지조차…. 하루 속에 담긴 한 흑인의 이야기는 별개의 이야기이고 비극인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별개가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다. 하루 동안 볼 수 있었던 ‘오스카 그랜트(마이클 B. 조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고, 좋은 남편, 그리고 좋은 아들이 되고 싶었다. 좋은 사람, 그가 열망하는 그 모습은 과거가 어떻든 그는 버림을 받았다. 그를 비춘 앵글의 따뜻함과 그가 속해있는 사회의 냉혹함이 묘하게 모순되고 있다. 어쩌면 감독 ‘라이언 쿠글러’의 따뜻한 시선 때문에 의도된 것이리라. 차분하면서도 관조적인 시선을 갖고 있는 영화이면서도 어딘지 모를 따뜻함으로 인해 오스카는 위로 받아야 할 인간임을 조금씩 보여준다. 그리고 오스카는 자신이 처한 현실 앞에서 최선을 다한 것 같다. 문제는 그의 노력이 단 하루라는 시간 속에도 그다지 효과는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 그는 그냥 잉여 인간일 뿐이었다. ‘만약’이란 단어가 생각날 만큼 그의 밤의 시간은 슬펐다. 그리고 뭔지 모를 뭉클함이 일어난다. 백인 경찰들이 왜 그랬는지는 이해하겠는데 그래도 가슴이 아팠다. 다르다는 게 어느 순간 틀린 것이라는 판단을 받게 되고 그로 인해 빚어진 편견과 차별의 비극은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이 아파하고 슬퍼하는 부분이다. 이제 이 편견과 차별은 시공간을 가리지 않고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시공간에도 자행되고 있다. 오스카든 우리든 그렇게 잉여되고 있는 것이다. 버림받는 다는 것은 한 사람의 비극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Fruitvale’라는 기차 역에서의 모습은 슬픈 마음을 갖고 있는 이들의 잔잔한 위로일 것이다. 버림 받은 자의 최선을 다한 노력이 차별로 인해 뭉개질 때, 그 아픔은 몇몇 가족이나 친구의 슬픔만은 자아내지 않는다. 우리 모두의 공감과 위로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런 슬픔에 대한 사회적 비용은 그리 작지 않는 법이다. 노력해도 되지 않은 세상을 저주할 것인지 아니면 고려대학교에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를 부쳐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문제는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도 힐링도 잘 되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그런 상황에 우린 놓여 있으며, 오늘도 힘겹게 산다. 우리를 위한 위로가 없어지고 있는 지금 오스카 그랜트의 하루의 이야기는 참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영화 보고 좀 힘들게 됐다. 그래서 조금씩 뭔가를 바꿔야 할 것 같다. 개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 모두가 전염병에 걸리 듯 말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위로도 받고 치료도 받는 우리들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