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검색
검색
천리마 축구단(2002, The Game of Their Lives)
배급사 : (주)동숭아트센터
수입사 : (주)동숭아트센터 / 공식홈페이지 : http://www.nara2005.co.kr

[뉴스종합] CQN명동에서 만나는 북한 축구단의 8강 신화! 06.06.09
북한 축구의 힘 ★★  asurabakzak 10.06.11
북한의 월드컵 8강진출 다큐영화 짠한 감동의 물결이 밀려옵니다. ★★★★☆  ghkxn 09.07.10
1966사건을 자세히 알 수 있어 좋았다 ★★★★  gg330 09.01.11



4년의 기다림 끝에 성사된 북한 촬영
: 영국의 젊은 다큐작가는 왜 북한을 찍기로 마음먹었을까!

TV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명망을 쌓아가던 대니얼 고든은 어릴적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1966년도 월드컵 경기를 담은 테잎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던 북한선수들의 드라마틱한 승부에 관한 영화를 찍고 싶은 이전부터의 생각을 드디어 실현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는 존재조차 없었던 작은 팀이 거인 같은 이탈리아를 물리치는 걸 보면서 설명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을 느꼈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언젠가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었다.

철저히 베일에 싸인 나라인 북한에서 촬영한다는 것은 모두들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지만 그는 그럴수록 꼭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촬영에 대한 허가를 북한당국으로부터 받아내고 촬영에 들어가기까지 자그마치 4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북한 정부는 다소 의심하는 가운데에서도 누군가 북한에 대해 중립적인 시선으로 이야기를 해보겠다는데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특히 과거 출전 선수들은 잊혀진 줄 알았던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 대해 매우 기뻐하였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2001년 10월 북한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영화는 북한에 사는 민간인들에 대해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인터뷰 허가를 얻어 만들어진 첫 번째 영화이며 서방의 매체가 북한 사람들 자신에 관해 말하는 것을 담은 최초의 영화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에게는 2002년 월드컵 당시 카드섹션에서 보았던 ‘AGAIN 1966’ 으로만 알려져 있던 궁금한 당시의 실제 경기장면을 촬영한 필름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흥미로움을 더하고 있다.

수수께끼의 나라에서 온 이상한 선수들,
공산국가를 응원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영국의 축구팬들

그들이 함께 이룬 꿈은 아직도 유효하다

1.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된 상황에서 북한에는 당시 경제 재건을 위한 천리마 운동이 한참이었고 수령인 김일성은 조국 인민들이 다 함께 천리마 시대에 발맞춰 나아갈 것을 지시했다. 또한 영국으로 떠나기 전 대표팀 선수들과 가진 만찬에서 그는 유색인종으로서 유일하게 나가는 것이니만큼 한 두 팀이라도 꼭 이기고 돌아오라는 교시를 내렸다. 이에 선수들은 수령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조국을 빛내야겠다는 결의를 다졌었다고 당시를 회고하지만 그렇다고 이 대회에서 이룩할 꿈 같은 승부를 미처 예상해봤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북한을 떠나올 때 그들은 교시를 이루고자 하는 천리마 전사들이었지만, 후일 이룬 엄청난 승부는 그들이 단지 정신적으로 무장된 공산주의자들이기에 가능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영국 팬들의 열정적인 응원이 없었더라면 과연 그들은 그런 성과를 낼 수 있었을까?

처음엔 조국을 위해 싸우는 전사로서 운동장에 나섰던 선수들은 예상치 못한 적국 국민들의 따뜻한 응원과 열광에 힘입어 이념을 초월한 멋진 스포츠맨으로서의 에너지를 얻어갔고 결과 그들의 멋진 플레이는 영국 축구팬들을 매료시켰다. 그렇게 하여 도저히 한 데 어울릴 리가 없는 이질적인 두 나라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도 믿기 힘든 신화를 함께 만들어나간 주인공이 되었다. 현실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꿈 같은 이상이 거짓말처럼 그렇게 이뤄질 수도 있다는 것을 몸소 느낀 이들은 그 자리에서 직접 뛰었다는 것, 그리고 그 경기를 직접 지켜보았다는 것 만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벅찬 인생의 경험을 얻게 되었다.

2. 그들이 이룩한 신화는 선수들이 고향인 북한으로 돌아간 뒤 비록 잊혀진 사건으로 이내 묻혀졌지만 그 경기를 감명깊게 본 축구광이었던 대니얼 고든 감독의 아버지로부터 아들인 대니얼에게 전달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때의 승부가 북한선수들의 가슴 속에 얼마나 충만한 긍지로 자리잡았는지, 또 영국인들의 마음 속에 얼마나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는지 벅찬 경험의 순간들이 남긴 위대한 흔적을 되살리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또한 영화가 완성된 해이며 한국에서는 월드컵 열풍이 불었던 2002년, 고든 감독은 선수들 전원을 북한 당국의 허락을 얻어 미들스브로로 초청하였는데 물론 이 때도 여전히 영국과 북한간에는 외교관계가 없는 사이였다. 40여년만에 과거 영광의 장소로의 여행을 하게 된 이들은 ‘북한 월드컵팀 2002 투어’ 라는 글자가 새겨진 옷을 입고 추억의 장소들을 둘러보았고 BBC는 이 광경을 생방송으로 내보내는 등 환대를 하였는데 한 여섯 살짜리 꼬마는 자기 할아버지가 박승진 선수의 싸인을 받아오라고 했다며 싸인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1966년 그들이 이뤄낸 꿈은 단지 흘러간 과거사가 아니라 사람들 개개인의 마음속에 깊이 남는 것이었음을 입증하는 순간이었다.

차가운 냉전의 벽을 허문 따뜻한 우정
: “영국의 인민들이 모두 우릴 응원하니까네 어리둥절 했습네다”

한국전 종전이 10여년 밖에 지나지 않은 냉전 상황에서 북한팀은 영국에서도 공격적이고 경직된 빨갱이로만 알려져 있었다. 세계적 이벤트인 월드컵이 자신들이 사는 도시에서 열린다는 것만으로도 들뜬 미들스브로의 관중들은 북한의 첫 경기인 소련과의 대전에서 조직력과 속도감 있는 플레이를 구사하면서 덩치 큰 소련선수들의 의도적인 반칙을 막아내는 작은 체구의 북한팀을 응원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졌지만 이들의 남다른 플레이에 반한 이들은 그 다음 칠레전부터는 마치 북한을 홈팀 응원하듯이 했고 박승진의 한 골로 무승부로 경기가 마감되자 한 해군병사가 나와 북한 선수들을 얼싸안았다. 북한팀의 숙소였던 공항호텔에는 영국 팬들이 모여들었고 아이들은 선수들의 무릎에 앉아 싸인을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때 북한 대표팀 선수 모두의 싸인을 받았던 미들스브로의 한 소년은 중년이 된 지금까지 그 때의 싸인북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게다가 8강전에 진출한 북한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10대 팬들이 “동양의 황태자 박두익”이라는 배너까지 만들어 미들스브로에서 리버풀까지 3천여명이 몰려가 뜨거운 응원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 미들스브로 시장은 만찬을 열어 북한팀을 초청하였는데 “그들은 훌륭한 선수이자 신사들이었다”고 평하였고 이에 북한팀은 ‘영원한 우정’이라는 노래로 시장의 환대에 답하였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40여년 전을 회고하게 된 당시 선수들은 그 시절, 영국인들이 자신들을 그토록 열렬히 응원해주었던 것에 대해 아직도 그들이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그 때 느꼈던 영국국민들에 대한 따뜻한 환대를 그리워하였고 제작팀을 만나자마자 가장 먼저 당시 미들스브로 시장님의 안부를 묻기도 하였다.

월드컵이 아니었으면 결코 만날 수 없었던 이질적인 두 민족 사이 우정의 꽃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피어났다. 유능한 외교사절이 수십 번 왕래하여도 이루기 힘든 꿈 같은 화해가 마치 소설처럼 이루어질 수 있는 장, 스포츠가 최고의 민간 외교라는 것을 입증하는 최고의 예를 보여준 것이 아닐 수 없다.

Players
1966 천리마 용사들

:: 영화 제작 당시 생존하여 이 영화의 인터뷰에 응한 1966 대표팀 선수들
박두익(7번), 한봉진(11번), 박승진(8번), 임성휘(6번), 양성국(7번), 리창명(1번), 림중선(5번), 명려현(감독)

:: 당시 북한 선수들에게 있어서 축구를 한다는 것은…
당시 북한 사회의 강령은 ‘속도’와 ‘노력 경쟁’이었다. 전후 완전히 폐허가 된 북한에선 재건이 가장 시급한 사안이 되었고 김일성식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광속으로 건설하려는 ‘천리마 운동’이 전개되었다. 김일성 수령은 축구에 대한 지침 또한 내려주었다. “축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첫째, 잘 달리는 것, 둘째 잘 차는 것, 셋째, 노력 경쟁이다. 조국 인민들이 천리마 시대에 발맞춰 경제 건설에 박차를 가할 때 축구 선수들도 천리마 정신으로 무장하라”는 교시였다.

박두익 (7번)
對 이탈리아전에서의 멋진 승부 골로 이름이 세계에 알려지게 된 박두익은 나중에 북한 국가대표팀 코치가 되었다. 한국전쟁 직후 인쇄공장 노동자로 있으면서 볼 차기를 시작했고 그 능력을 인정 받아 20살이 되던 57년, 평양시 최우수 선수단에 들어가면서부터 전문선수로 활동하게 되었다. 월드컵 이후 고국에서 스포츠 영웅의 대접을 받게 된 박두익은 “그 이후엔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위반을 해도 박두익이라고 씌여있는 증명서를 보여주면 그냥 통과시켜주기도 했습니다”라면서 자신들에 대한 북한 사람들의 환대를 계면쩍은 웃음으로 설명해주었다.

박승진 (8번)
당시 북한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정평이 났던 박승진은 경기 종료 5분 전까지 지고 있던 칠레전에서 당당한 한 골로 승부를 뒤집어 당시 영국 관중들로부터 북한 열풍을 몰고 온 결정적 주역이다. 월드컵에서의 활약상을 다룬 북한의 신문은 그를 가리켜 “요술사처럼 재주를 부리는 선수” 등의 화려한 수식어를 붙이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 그는 소위 남한의 박지성 선수와 같은 인기를 한 몸에 누린 선수라 할 수 있다.

리창명(1번)
북한 최고의 문지기로 날렵한 체구로 골을 막아내는 능력이 탁월했던 선수다. 다리 힘을 키우기 위해 다른 선수들보다 배가 되는 노력을 하였고 언제나 ‘작은 골 문이지만 내 뒤에는 조국이 있고 거기에는 인민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으로 높은 자책감(책임감)을 가지고 경기에 임한 모범적인 천리마 전사. 현재에도 조선인민군 축구팀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림중선(5번)
아버지가 축구인인 축구 가정에서 태어났다. 림중선의 아버지는 아들을 유능한 축구선수로 키우기 위해 어려서부터 축구를 가르쳤고 따라서 그는 인민학교 시절부터 중학교까지 내내 학교 선수로 활동했으며 졸업 후 57년부터 전문 선수로 기량을 발휘했다. 타고난 축구감각과 오랜 시간 훈련된 기량으로 66년 월드컵에서 훌륭한 수비수로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영화보다 파란만장한 북한팀 출전기

1. 아시아가 월드컵에 명함도 내밀기 어렵던 그 시절!

1966년은 최초로 전 세계에 TV중계가 된 사상 최고의 스포츠 이벤트로서의 월드컵의 출발을 알린 해였다. 하지만 전후 냉전이 고조된 시기이니만큼 철저히 베일에 가려진 강성 공산국가인 북한이 세계의 축제인 월드컵에 출전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껄끄러운 일이었다.

당시 본선(16강) 티켓은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에 통틀어 딱 한 장이 배정되자 차별에 분노한 아프리카 대륙의 전 국가가 출전을 거부했고 남한 또한 출전을 거부하여 북한과 호주만이 본선 티켓을 놓고 겨루게 되었다. 한국전 당시 적으로 싸웠던 호주와 북한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선전은 3국인 캄보디아에서 열렸다. 북한팀의 전력을 무시한 호주팀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방만한 자세로 북한전에 임했고 10개월 전부터 월드컵을 준비해왔던 북한은 6:1과 3:1로 대승하였다.

2. 서슬퍼런 냉전 시기,
  북한사람이 영국땅에 들어가려면 국가도 울리지 말아라!

당연히 떨어질 것으로 예상했던 북한이 본선에 오르자 영국 외무성은 골치가 아파졌다. 북한을 주권국으로 인정하면 유럽의 공산국가인 동독에 대해 규제를 가하는 것이 난처해질 판이고 외교국인 남한과도 불편한 상황이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나라의 국호를 호명하는 것, 그 나라의 국기를 게양하는 것, 국가를 연주하는 것 모두 다 걸리는 문제였다. 하지만 모든 나라가 동등하게 축제를 즐길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영국의 체육부와 외교적 불상사를 꺼리는 외무성의 줄다리기 협상 끝에 결국 국명은 북한(North Korea)으로 하고 국기를 게양하는 것까지는 허락되었다. 그러나 국가 연주만은 개막전 출전국과 결승전(북한이 올라갈 리가 만무하다고 생각되는) 진출국의 국가만 연주하는 것으로 하여 북한의 국가가 영국 땅에 울려 퍼지는 것을 막았는데, 이렇게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 받는 것 조차 힘겨웠던 북한의 선수들은 더더욱 절박한 승리에의 에너지를 비축하게 되었다.

<Tip> AGAIN 1966 ! 영국 월드컵 생중계
총 16개국이 본선에 올라 각각 4개의 조에 편성이 되었는데 15개 국가 이름이 모두 불린 뒤 마지막에야 북한의 조가 결정되었다. 이탈리아, 칠레, 소련 과 함께 4조에 배치된 북한은 영국 북동부의 공업도시 미들스브로에서 승부의 장을 펼치게 되었다.

<조별 경기>
소련전 (0:3 패)
평균신장 162cm의 작은 체구이지만 만만치 않은 북한팀의 저력을 알고 있던 소련팀은 큰 체구를 이용해 공격적인 육탄전과 노골적인 반칙을 구사해 결국 3:0으로 북한을 이기고도 야유를 받았다. 또한 그 때부터 관중들은 약소팀인 북한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칠레전 (1:1 무승부)
쏟아지는 빗속에서 진행된 경기에서 북한은 패널티 킥으로 한 점을 먼저 잃고 경기 종료 5분 전까지 0:1로 지던 상황이었다. 이렇게 질 것이 불 보듯 뻔한 경기를 일순 뒤집은 것은 북한 제일의 골잡이 박승진(8번)의 한 골이었다. 관중들은 지난 소련전에서도 비록 지긴 했으나 멋진 플레이를 보인 약팀 북한을 마치 홈팀 대하듯 열성적으로 응원하였고 박승진의 골이 터져 믿을 수 없는 동점을 이루자 열렬히 환호하였다. 당시 미들스브로의 시장은 “이런 경기는 처음이었다. 심장이 한 쪽 떨어져 나간듯 한 느낌이다” 라고 격찬하였다.

이탈리아전 (1:0 승)
이미 월드컵을 2회 석권한 강력한 우승후보국 이탈리아에게 8강 진출이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경기 41분만에 박두익(7번)이 한 골을 넣자 관중들은 상상도 못한 한 골에 열광하였고 결국 믿지 못할 북한의 8강 진출이 결정되었다. 이탈리아는 구겨진 자존심을 안고 패잔병으로 귀국해 국민들부터 토마토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이후 이탈리아 축구계에는 ‘코리아의 악몽’이란 표현이 한참 동안 돌았다고 한다.

<8강전>
포르투갈 전 (3:5 패)
포르투갈전에 대해 당시의 축구관계자와 관중들은 아마도 북한이 0:2 정도로 패할 것이라 예상하였다. 하지만 이런 예상을 꺾고 북한은 경기 시작 1분 여만에 박승진의 한 골을 시작으로 연이어 2점을 넣어 전반 20여분만에 3:0의 믿기 힘든 상황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해 월드컵의 득점왕상을 받게 된 세계적 스트라이커 유세비오의 반격으로 4점을 잃고 한 점을 더 잃어 결국 3:5로 패하고 만다. 경기 내용이 훌륭하였음에도 국제 경기의 경기운영 면에서 경험부족에서 온 미숙함을 드러낸 경기로 평가되며 북한팀의 신화 창조는 막을 내렸다.



(총 1명 참여)
ejin4rang
대단한 영화     
2007-12-05 09:34
1
1일동안 이 창을 열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