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이후 3년. 국내외의 지대한 관심 속에 허진호 감독의 차기작 [봄날은 간다]가 지난 2월 촬영에 착수했다. [봄날은 간다]는 [8월의 크리스마스]와 어떤 면에선 상당히 닮아 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이 사진사이고 그가 찍는 사진들이 순간을 포착해서 기억을 붙들어 놓는 것처럼 [봄날은 간다]의 상우는 녹음기사고 잊혀져 가는 소리를 녹음기에 담는다.
소리와 함께 녹음된 조용한 사랑
겨울 산사에 눈 오는 소리,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 늦여름의 파도 소리... [봄날은 간다]에 등장하는 소리들은 참 운치 있다. 분주한 도시가 아닌, 거의 절대적인 정적 속에서만 발견해 낼 수 있는 소리들이다. 녹음 여행을 함께 하면서 상우와 은수는 소리가 남기는 정서적 파장을 통해 교감하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사랑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처음이자 마지막인듯 사랑의 열병에 빠진 상우와 달리, 이미 사랑을 겪었던 은수는 상우와의 관계가 진행되면 될수록 그 사랑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상우는 “사랑이 어떻게 변할 수가 있어?”라고 묻지만, 은수는 “뭘 간절히 바래도 다 잊고 그러더라”라고 대꾸한다. 아무리 격정적인 사랑이라도 그것이 시작되는 순간 잊혀짐 역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은수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잊었다고 생각한 사랑이 기억으로 돌아 올 때
변하고 잊혀졌다고 생각해도, 사랑은 언제나 기억으로 되살아 온다. 치매에 걸려 다른 것은 모두 잊어도 찬란했던 사랑의 한 순간만은 또렷이 기억하는 상우 할머니의 모습은, 떠나가는 사랑에 안타까워하는 상우에게도, 간절히 원해도 다 잊더라고 냉소하던 은수에게도 사랑의 편린들이 간직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녹음기에 담겨 있던 소리가 재생 버튼을 누르면 언제라도 다시 들려 오듯이...
빛도 다르고 공기도 다르기 때문에... 정서는 표현된다.
[봄날은 간다]는 강원도 일대를 돌며 촬영했다. 물론 이 영화가 자연의 소리를 담는 녹음여행이 내용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도 그렇지만, 허진호 감독이 만들어 놓고 찍는 세트에서보다는 실재하는 곳에서 찍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해 허진호 감독은 빛도 다르고 공기도 다르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응수했다. 아무리 소중한 시간이라도 되돌리거나 정지시킬 수는 없다. 자신의 삶에 찬란했던 어떤 순간들을 각각 사진과 소리로 잡아 두려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과 [봄날은 간다]의 상우처럼 어쩌면 허진호 감독은 앞서 언급한 빛도 다르고 소리도 다른 그 시공간을 필름에 담아두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봄날은 간다]에 공감하는 이유는, 누구의 삶에든 그렇게 담아두고 싶은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