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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클 분미> <옥희의 영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옥희의 영화 | 2010년 9월 29일 수요일 | 허남웅 이메일

<옥희의 영화> 생물 같은 영화의 경지

홍상수 영화는 살아 숨 쉬는 생물 같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체적으로 <극장전>(2005)을 전후해 그의 영화는 남녀관계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과 스크린 속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영화가 현실을, 현실이 영화를 모방하도록 연결, 뫼비우스의 띠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관객이 적극적으로 사고하지 않고서는 따라갈 수 없는 ‘살아있는 영화’의 경지에 다다랐다.(<극장전>의 마지막 대사. “이젠 생각을 해야겠다. 끝까지 생각을 하면 뭐든지 고칠 수 있어. 담배도 끊을 수 있어. 생각을 더 해야 돼.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죽지 않게 오래 살 수 있도록.”) <옥희의 영화>는 눈이 아닌 두뇌로 볼 것을 요구하는 홍상수의 연출이 극대화된 경우다. 영화과 학생 옥희(정유미)와 진구(이선균), 그리고 송 교수(문성근)의 삼각관계를 그린 4개의 단편이 각자 자체적인 완성도를 가지고 서로에게 느슨한 형태로 개입하며 장편으로 확장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 ‘주문을 외울 날’의 진구는 시간강사이자 영화감독이다. 낮에는 지도편달중인 여학생과 의견 충돌을 일으키고 그 뒤엔 술자리에서 송 선생과 불미스러운 일을 겪으며 저녁엔 자신이 만든 영화의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작품과는 전혀 관계없는 질문을 받곤 곤혹스러워한다. 두 번째 ‘키스왕’의 진구는 학생이다. 송 선생으로 불리는 지도교수에게 단편영화 연출이 뛰어나다고 칭찬을 받는다. 하지만 그의 관심사는 같은 과 친구 옥희다. 옥희가 송 선생과 깊은 관계인 것으로 보이자 진구는 그녀에게 더욱 집착을 보인다. 그렇다면 송 선생에게는? 감정이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지만 세 번째 ‘폭설 후’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아 보인다. 폭설로 수업이 지연되고 참석한 학생도 진구와 옥희 뿐이다 보니 질의응답 시간이 돼버린다. 우문에 현답으로 응하는 송 선생을 진구는 거부감 없이 대하지만 송 선생은 교수 생활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뒤다. 그리고 마지막 ‘옥희의 영화’에서 옥희는 진구와 송 교수와 각각 아차산에 올랐던 경험을 영화로 찍어 교차해 보여준다.

<옥희의 영화>는 기존의 영화처럼 스크린 속 일방적으로 제공되는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이해가 곤란하다. 앞서 요약한 줄거리에서 보듯 <옥희의 영화>의 이야기 서술과 캐릭터 설정에는 일관성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진구, 옥희, 송 선생으로 지칭되는 인물의 등장은 일정할지언정 이들의 역할과 성격, 관계 등은 뒤죽박죽이다. ‘주문을 외울 날’에서 시간강사이자 영화감독이었던 진구가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영화과 학생으로 등장하질 않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진구의 집이었던 곳이 ‘키스왕’에서는 옥희의 집인 것으로 보이고 돈을 받고 후배 강사에게 교수 자리를 주었다며 비난받던 송 선생이 ‘폭설 후’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쪽팔려서 이 짓은 이제 그만두어야겠다.”며 마치 고뇌하는 지식인인양 군다. 또한 ‘옥희의 영화’에서 옥희는 내레이션을 통해 송 선생은 ‘나이든 분’으로, 진구는 ‘젊은 남자’로 호칭하기도 한다.
홍상수는 의도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교란하고 인물을 중첩시킨 뒤 결국엔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마저 어지럽힌다. 그러니까 <옥희의 영화>는 전통적인 영화의 문법을 완전히 해체해버린다. 늘 보던 대로 교란된 시간을 시간 순으로 재배열하고 그에 따라 공간을 재구획한 뒤 인물의 역할과 이야기의 합을 맞추려다가는 혼란에 빠지고 만다. <옥희의 영화>는 그 자체로 완제품인 기존의 영화의 달리 주어진 4개의 단편을 보는 이의 기호와 취향, 생각 등에 맞춰 재구성하는, 관객이 참여할 때 비로소 완제품이 되는 일종의 ‘상호작용’(Interactive) 영화라 할만하다. 그래서 ‘주문을 외울 날’, ‘키스왕’, ‘폭설 후’, ‘옥희의 영화’ 순으로 구성된 순서를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아도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하등 문제될 이유는 없다. 여기에는 현실의 비(非)확실성에서 유발되는 우연의 미학을 긍정하는 태도가 기저에 깔려 있다.(잘 알겠지만 홍상수는 정해진 각본 없이 최소한의 설정만 가지고 그날그날의 조건에 따라 즉흥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촬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폭설 후’의 경우, 눈이 가득 쌓인 날씨에 아이디어를 얻어 그날 이야기를 짜고 배우를 불러 무려! 촬영까지 마친 경우다.)

<옥희의 영화>는 장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유기적으로, 혹은 개별적인 에피소드라고 해도 될 만큼 독립적으로, 그러니까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형식을 달리하게끔 연결되어 있다. 세 명의 주인공이 각자의 관점에서 서로의 관계를 고찰하며 어쩔 때는 영화 속 영화로 재구성되기도 한다. 인물간의 역할 중첩과 차이로 이야기의 변화를 꾀한다는 점에서 <강원도의 힘>(1997) 또는 <생활의 발견>(2002)이, 극중 영화가 현실에 침투한다는 점에서 <극장전>이 연상되는 등 <옥희의 영화>는 홍상수 영화의 진화형이라 할만하다. 실제로 <옥희의 영화>의 배우들은 홍상수의 중편 <첩첩산중>(2009)에서 그대로 넘어온 경우다. <옥희의 영화>는 4개의 단편을 ‘겹치고 겹침’(疊疊山中)으로써 그 속에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관계의 복잡성은 물론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점철된 현실의 극적인 광경까지 숨겨놓는다.

<엉클 분미> 경계를 집어 삼킨 정글의 영화

<엉클 분미>의 원제는 ‘전생을 기억하는 분미 아저씨’(Uncle Boonmee Who Can Recall His Past Lives)다. 그런데 이 영화가 보여주는 전생의 정체는 구체적이지가 않다. 당연하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평면적인 형태의 구체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대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 볼거리가 아닌 해석의 대상으로 입체화(化) 하는 것이 그의 영화의 특징이라 할만하다. 오히려 설명적인 제목에서 감지할 수 있듯 <엉클 분미>는 아핏차퐁의 전작들과 비교해 친절한 편이다. 어느 정도 줄거리 요약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이야기가 잡힌다고 해서 그의 영화가 쉽게 이해 가능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엉클 분미>의 분미(타나팟 사이세이마)는 신장질환을 앓고 있는,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다. 시골 농장에 머무는 동안 그의 곁에 처제와 젊은 청년 통이 남아 분미를 돌본다. 분미 곁을 떠도는 유령 같은 존재도 등장한다. 저녁식사를 하던 중 오래 전에 죽은 분미의 아내가 별안간 모습을 드러내고 실종됐던 아들이 원숭이 인간이 되어 돌아온다. 오랜 만에 아들, 아내와 함께 회포를 푼 분미는 편안하게 죽음을 준비한다. 그러던 어느 날,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분미는 주위의 가족을 대동하고 숲속으로 들어간다. 미지의 동굴을 발견한 분미는 그곳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고 화면은 곧 어느 호텔방으로 옮겨간다. 침대 위에서 분미의 처제와 그녀의 딸로 보이는 여성이 부조금을 정리 중이고 스님 한 분이 이들과 합류한다.

이해가 쉽도록 요약은 했지만 <엉클 분미>는 일관된 이야기의 맥락을 붙잡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죽음 혹은 전생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지만 이 또한 확실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영화는 관객에게 느낌을 전달하는, 앞의 문장 중에서 빌리자면, ‘~같지만’의 이미지를 형성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보는 편이 옳다. 사실 <엉클 분미>에서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미비하다. 분미의 이야기가 펼쳐지던 중 뜬금없이 오래전 과거의 시간으로 점핑해 못생긴 공주와 메기의 에피소드가 끼어들기도 한다. 분미와 못생긴 공주, 메기 사이에 구체적인 연관성을 잡아내는 것도 애매하다. 시간을 초월한 공간 묘사를 통해 ‘어떤’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에 더 방점을 맞춘 까닭이다. 다시 말해, 두 이야기 사이의 연결점보다는 동일한 공간(으로 보이는 장소)에서 에피소드라고 할 만한 것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를 한 편이라도 본 이들이라면 그의 영화에서 숲(혹은 정글)이라는 공간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테다. 그의 영화에서 숲은 현실과 비현실, 픽션과 다큐멘터리 사이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마술적인 공간’, 즉 영화적 환상이 기능하는 장소다. 아마도 <열대병>(2004)이 대표적일 텐데 문명과 야만, 로맨스와 민담 등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를 확연히 가르며 우리가 경계 지었던 대비되는 개념의 이미지들을 하나의 소우주로 구현해 보였다. 하여 아핏차퐁은 이야기를 다룬다기보다는 이미지를, 아니 세계를 구성한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엉클 분미>에서도 숲은 그냥 숲과는 거리가 멀다. 현세와 내세가 공존하는 공간이면서 원시적 생(生)과 관념적 사(死)가 근접해 존재하는 곳이고, 그럼으로써 전생이라고 하는 개념이 아닌 전생을 둘러싼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영화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영화평론가이자 영화감독이고 시네마디지털서울 영화제 프로그램 디렉터인 정성일은 <엉클 분미>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을 썼다.(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실제로 <엉클 분미>의 분미는 실존하는 인물이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이를 바탕으로 한 ‘전생을 기억하는 남자’라는 원작에서 영감을 얻어 영화에 착수하게 됐다. 하지만 원작의 설정과 캐릭터의 이름만 가져왔을 뿐 감독은 다분히 개인적인 영화로 개비했다. 예컨대, 분미처럼 아핏차퐁의 아버지는 신장질환을 앓고 있고 극중 투석기는 아버지의 것을 그대로 가져와 사용했다고 한다. 영화 속 라오스 접경지역은 과거 타이와 라오스와의 전쟁이 벌어졌던 곳이고 원숭이 인간의 붉은 눈 역시 감독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태국 TV 시리즈물의 특정 장르 요소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라고 전한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영화란 ‘기억’이다, 라는 요지의 얘기를 했다. 기억은 사실(Reality)의 소환이면서 한편으론 재현이라는 점에서 환상(Illusion)이다. 아핏차퐁의 영화는 사실을 재현한다. 엄밀히 말해 모든 영화가 사실을 재현하지만 아핏차퐁은 사실과 재현 사이를 굳이 구분하지 않는다. 가령, 분미의 아내 귀신이 나타나는 장면에서도 그는 별도의 영화적 장치를 이용해 관객의 눈길을 끄는 대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대로 흘러 넘긴다.(오히려 아내 귀신 대신 분미와 처제의 얼굴을 비추는 식이다.) 이런 작품을 일러 ‘무경계의 영화’라고 불러도 좋을까? 틀린 얘기는 아닐 것이다.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Media City Seoul 2010’가 한창인데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다큐멘터리 영상 ‘프리미티브’ 중 <Letter to Uncle Boonmee> 전시가 한창이다. 그는 이참에 영화와 전시를 한 묶음하며 스크린의 경계마저도 넘어선 것이다.

미래의 영화 혹은 21세기 영화?

살펴본 바, 우연처럼 같은 날 개봉한 <옥희의 영화>와 <엉클 분미>는 새로운 영화 보기의 방법을 제시한다. 홍상수와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이를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와 캐릭터 중심의 전통적인(?) 영화가 난립하는 추석 극장가에서 <옥희의 영화>와 <엉클 분미>는 확연히 다른 영화 문법으로 관객을 (긍정적, 부정적 의미로든)혼란에 빠뜨렸다. 이는 일방적인 정보의 제공과 주입식 영화에 익숙해진 관객에게 전혀 다른 영화의 차원을 선사했다. 일방향이 아닌 쌍방향의 영화. 영화가 문제를 제시하고 관객이 이에 답하는, 혹은 감독이 질문을 던지고 관객이 해석하는 영화. 영화가 스크린에 머물지 않고 스크린 밖으로 넘어오는 시대. <옥희의 영화> <엉클 분미>와 같은 영화가 이번에 처음 선을 보인 것은 아니지만 개봉영화 시장에서 대중성과는 동 떨어진 두 편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영화의 세기가 그리 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린 과거와 현재의 영화 보기에 익숙한 나머지 이미 도달한 미래의 작품들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외면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옥희의 영화>와 <엉클 분미>는 우리 곁을 찾아왔다.

2010년 9월 29일 수요일 | 글_허남웅 (영화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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