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즈>는 한마디로 말해서 ‘까부는 영화’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까부는 게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까불면서 성장하지 말라는 법도 없구요. 오히려 제대로 성장한 사람은 잘 까붑니다. 제대로 까불 줄 알지요. 하지만 그 역이 성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면, 까불기만 하는 것 같아도 알게 모르게, 그리고 자기가 다 알아서 속을 채워나가잖아요. 크고 작은 고통과 시련을 겪으면서 말입니다. 영화 속의 두 여자도 그런가요? 다만 씩씩하게, 징징대지 않고 쿨하게?
‘쿨하다’라는 표현이 어느덧 널리 쓰이게 되어 이제는 별로 ‘쿨한’ 표현이라는 느낌이 안 드네요. 그런데 그 쿨하다는 게 어떤 건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 자주 나오는 ‘드라이하게’라는 표현과는 또 좀 다른 것 같고, 가령 ‘내숭 떨지 않는다’, ‘지저분하게 굴지 않는다’, ‘앞뒤가 탁 트였다’, 뭐 그런 의미들로 쓰이는 겁니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표현이 유행어로 퍼지면서 다분히 가벼운 제스처의 느낌을 풍기게 되었다는 겁니다. 어머, 저 남자 참 쿨하게 생겼다, 하는 식으로… 역시 나쁠 게 없지요. 가볍다는 것은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싱글즈>의 가벼움은 어떤가요? 그보다 먼저, 그 영화가 ‘폼 잡는 영화’라는 데 동의하십니까?
오히려 정반대라는 의견이 많다는 것을 압니다. <싱글즈>는 남녀간의
그런데 누가 그걸 모른답니까? 다 알면서 속아주고 웃어주고 가슴도 뭉클해주고 그러는 거죠. 그런 게 장르 영화를 보는 재미인 거죠. 그걸 좀 다르게 갔다고 해서, 그걸 가지고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악습을 타파했다 어쨌다 평가할 수 있는 건가요? 그냥 <싱글즈>는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다, 해버리면 그만이지요. 그런 뒤에 수평으로 비교해 보면, <닥터 봉>과 <웨딩 싱어>, 재미있지 않습니까? <싱글즈>가 그 영화들만큼 잘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나요? 설령 <싱글즈>를 로맨틱 코미디의 변종으로 인정한다 해도, <브리짓 존스의 일기>와 견주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 영화, 환상과 허위는 이렇게 뒤집어 보여주는 거라고 한 수 가르쳐주는 영화라구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폼은 언제 어디서나 종목을 가리지 않고 잡을 수 있다는 것. 때로는 폼을 안 잡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잡는 폼이 더 겉멋 들린 폼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한 가지 더, 그런 겉멋까지도 역시 나쁠 것은 없다는 것. <싱글즈>가 거기에서 멈췄다면, 그렇게 폼 잡고 까부는 데 그쳤다면, 그저 재치있고 귀여운 트렌디 영화 한 편 봤다는 가벼운 소감으로 족했을 겁니다. 그런데 감독이 정말로 성장 영화를 만들고 싶었나 봐요. 영화가 안 그런 척하면서 자꾸 의미를 찾아나서잖아요. 결혼에 대해, 가족에 대해, 일에 대해, 그리고 정말로 성장에 대해… 그거 꽤 만만치 않은 시도거든요. 안 그런 척하면서 그러는 거요. 사실은 잘 만들어진 로맨틱 코미디는 다 그 작업을 능숙하고 정교하게 해낸 거라고 보면 됩니다. 내레이션 몇 마디로 간단히 해결될 과제가 아니지요.
영화에 동미라는 인물이 나오죠. 화끈하고 솔직한 성격의 여자라고 해 둡시다. 그녀가 룸메이트 정준과 함께 저녁을 먹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쯤 제대로 한번 했겠다.” 친구 난이 애인과 함께 호텔에 있을 시간이라는 짐작입니다. 순진남 정준은 찌개를 뜨다 말고 떨떠름한 표정을 짓네요. 그러자 동미가 짜증난 목소리로 말합니다. “샤워, 이 병신아.”
그런 장면은 하나도 안 웃깁니다. 웃기려는 장면이 아니라, 섹스라고 넘겨짚은 정준을 통해 남성의 어떤 면을 까발리기라도 하려는 의도였다면, 그러면 정말 웃기는 자장면입니다. 동미의 그런 말투가 요즘의 트렌드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친한 친구에게는 그렇게 막 대해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거침없는 성격의 소유자이기에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을 그토록 시원시원하게, ‘쿨하게’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겠냐고 이해해주기를, 감독은 바라는 걸까요? 아니면, 속으로야 얼마나 고민이 많았겠냐고, 넌지시 내비칠 생각도 않는 영화의 속을 봐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걸까요? 만약에 이 영화가, 사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니냐, 뭘 자꾸 어렵게 생각하려 드느냐고 타이르고 싶은 거라면, 접수하지는 못해도 이해는 하겠습니다. 단, 그런 제자리 걸음을 성장이라고 우기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사족입니다. 권칠인 감독은 인터뷰에서 <싱글즈>를 ‘여자 영화’라고도 지칭했더군요. ‘여성 영화’도 아니고 ‘여자 영화’라… 아무튼 좋습니다. 저는 호주제의 폐지를 적극 찬성하는 한 시민으로서, 우리 사회의 가부장 질서를 끔찍해하는 한 남성으로서, 남자 감독이 만든 좋은 ‘여자 영화’를 보고 싶습니다. 그 안에 담기는 삶의 양식이 꼭 싱글이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싱글이 아니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닙니다. 남자에게 기대어 살려 하지 않는 여자가 나오면 곧 좋은 ‘여자 영화’라는 등식이 성립하지는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인생에서나 영화에서나 중요한 것은 선택의 과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유행을 따라 여기저기서 힐리스 신발을 신고 굴러가듯이 가볍고 쿨한 풍경일 수만은 없습니다. 그 개인들의 실존적 선택의 결과, 싱글의 삶이 사회의 트렌드로 자리잡아 영화에 반영되기도 한다면, 그것은 막을 길도 막을 이유도 없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