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 자랑스런 우리의 지구를 폭파해버린 장본인은 놀랍게도,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이 부실해서 언어 장애를 비롯한 갖가지 컴플렉스를 지니게 된 것으로 여겨지는, 그 억하심정을 풀어보겠다고 신성 모독을 불사하며 전쟁놀이에 광분하는 저 아메리카 합중국의 대통령이 아니라, 그 무지막지한 인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변방의 가련한 반도에서도 또 반쪽인 나라에서 배출된 신출내기 영화 감독이었던 것입니다. 단지 희망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희망이 없다 해도 없는 것은 지구인이지, 지구한테야 무슨 죄가 있다고…… 묵묵히 돌고 돌며 제 소임을 다할 뿐인데……
한국 영화에 대해 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네요. 일부러 피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좋게든 나쁘게든 할 말이 있는 우리 나라 영화를 최근에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제가 게으른 탓이기도 하겠습니다만, 적어도 요즘에 제가 본 몇 편의 한국 영화는 그랬습니다. 슬퍼해달라는 영화는 별로 슬프지 않았고, 웃어달라는 영화는 그저 웃겼습니다. 영화 스스로 웃기려고만 하지 않고 딴 짓을 하는 통에, 보는 저로서도 별 수 없이 웃다가 말았지만요. 그런 얘기는 재미없을 것 같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떠신가요? 저는 우리 영화를 한 수 접고 보게 되는 편입니다. 가재가 꼭
그런데 저보다 심한 분들이 많던데요. 저는 장안에 소문이 자자한 한국 영화들을 놓치기가 일쑤거든요. <친구>도 비디오로 봤습니다. 하지만 하나도 켕길 것 없이 저는 그 영화가 좋지 않은 영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주 부드럽게 말해 그렇지, 저는 그런 영화에 그렇게 많은 관객이 들었다는 사실 앞에서 아연, 서글퍼집니다. 그런가 하면 관객이 외면해서 화제가 되는 영화도 있잖아요. <친구>도 비디오로 본 제가 <고양이를 부탁해>를 영화관에 가서 봤겠습니까. 역시 비디오로 봤다는 핸디캡을 무릅쓰고, 저는 그 영화를 아마추어 영화라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나쁘다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다만 그런 영화에 많은 관객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것은 넌센스가 아닌가, 상영 여건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지구를 지켜라!>를 보기 전에는 영화를 보고 나서 할 말이 많을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저만 그런가 싶어서 인터넷에 접속해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더니, 저만 그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뜨거운 호응 일변도이더군요. 흥행에 성공하고 있지는 못한 듯하지만, 영화를 본 분들은, 아니 영화를 보고 나서 할 말이 있는 관객들은 거의 다 네다섯 개의 별을 달아주고 있었습니다. 망하기엔 너무 아까운 영화…… 그리고 평론가들도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었구요. 감독이 신인다우면서 신인답지 않다…… 대단하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제가 주목한 것은 이 영화의 저조한 흥행에 대해 반성하는 마케팅 담당자의 생각이었습니다. 코미디로 홍보한 것이 관객의 기대를 배반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이 영화의 컬트적인 성격에 마케팅의 포커스를 뒀다면 그나마 누가 보러 왔겠느냐는 하소연이었는데요. 제가 보기에 그분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착각을 하고 있을 뿐이지요. 처음부터 컬트가 되는 영화는 당연히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이 영화에서 코미디는 분명히 중요한 포인트니까 거기에 초점을 맞춘 것은 그나마 적절한 홍보였습니다. 이 영화는 없는 게 없는 종합선물 세트다, 이런 식의 홍보에 끌릴 관객은 흔치 않겠지요.
<지구를 지켜라!>는 관객이 많이 들기 어려운 영화입니다. 이상하니까요. 이상한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이 문전성시를 이룬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 아니겠습니까. 이상한 것에서 천재성을 발견하는 비범한 관객도 있겠지만, 이상한 것을 싫어하는 것도 역시 취향의 자유겠지요. 그러니까 이 영화에 시큰둥한 관객은 기대가 배반당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배반 뒤에 따라야 할 보상을 받지 못해 그러는 거라고 봅니다. 탓할 수 없어요. 제가 아무리 <친구>의 대박을 서글퍼 한다 해도, 그 영화에 몰려든 관객들을 욕한다면 멍청하다는 소리 들어도 할 말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지구를 지켜라!>가 철저히 이상했다면, 영화 자체에 대해 할 말이 많았을 겁니다. 제가 심심했던 건 이 영화가 자꾸 적당한 선에서 얼버무린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신하균의 발음이 듣기 좋게 명확했을 뿐 아니라 관객을 빨아들이는 힘이 느껴졌다는 것을 칭찬하고 싶구요. 몇몇 다른 영화들에 기댄 것도 그런대로 재미있었고, 그보다는 ‘신신 물파스’와 ‘이태리 타월’ 그리고 백윤식의 외계인 언어 등등이 상당히 웃겼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이제 웬만한 한국 영화라면 능수능란하게 써먹는 감초 격에 불과하지요. 감독은 아마도 다르게 웃어주기를 기대했을 텐데요. 아픈 웃음이랄까, 엉뚱함 속의 상처를 봐 달라는 거였겠지요. 그런데 그 수법이 좀 안이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붙잡혀온 강사장이 어느 순간 갑자기 병구의 정체를 알겠다고 확신에 차 말하는 대목에서 저는 허술하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뭐 외계인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영화를 얕잡아 보기에 충분한 덜미가 아닐지요.
웃음과 아픔을 섞는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그냥 주인공의 과거가 이렇게 상처 투성이였다고 보여주는 걸로 얻을 수 있는 경지는 아닐 겁니다. 이 말은 소설을 쓰는 저 스스로에게 가하는 뼈아픈 일침이기도 합니다. <지구를 지켜라!>가 정말로 웃음을 통해 아프거나 아픔을 통해 웃게 하던가요? 저는 적당히 웃었고 별로 아프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아프다는 사실과 그 아픔이 느껴진다는 감정 사이에는 만만치 않은 장애물이 놓여있는 거라서…… 그래도 영화가 기발하지 않냐구요? 에이, 감독이 그 말을 듣고 좋아하겠습니까. 진짜 기발하고자 했으면 아픔이고 상처고 다 떨어내고 갔어야지요. 이 데뷔작의 미덕은, 가볍게 기발할 수도 있었던 유혹을 뿌리치고, 한껏 욕심을 부렸다는 데 있지 않나요? 그야말로 신인답지 않게 배짱 두둑한, 그래서 신인다운 패기 말입니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흔치 않은……
정리하자면 저로서는 <지구를 지켜라!>가, 감독에게 다른 영화를 만들었어야 한다고 말하는 실례를 범할 만큼의 태작은 아니지만, 이 소중한 지구를 함부로 날려버려도 될 만큼의 공을 들인 영화 또한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그 정도라면 지구를 지켜야지요. 그 정도가 어떤 정도냐 하면, 아까 말한 한국 영화의 프리미엄을 적용해서 그런대로 넘어가며 볼 수 있는 정도입니다. 물론 <고양이를 부탁해>와 같은 아마추어리즘은 아니구요. 노파심에서 다시 말씀드리면, 아마추어리즘이 나쁘다는 것은 절대 아니구요. 하지만 지구를 지키든 고양이를 부탁하든, 그게 사람들한테 잘 안 먹힌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이유는 없다는 얘깁니다. 그렇게 만들었으니까요. 뭔가 가능성은 보이는 거 아닙니까? 조용히 다음 영화를 기다려주는 게, 재능 있는 신인 감독을 향한 애정 표시로서는 가장 유효할 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