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웃 스타 중에 바쁘지 않은 사람 있겠냐만, 요즘 이 배우 정말 바쁘다. 일중독 수준으로 영화를 찍어대는 배우 몇 명 꼽기는 쉽지만, 여름 시즌에만 자신이 주연한 네 편의 영화를 거는 배우는 흔하지 않다.
꽃미남 주드 로도 2004년에만 무려 6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일독에 걸렸었지만 그 중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과 <애비에이터>는 까메오 수준이었다. 이혼 후에 정력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는 니콜 키드먼도 자세히 살펴보면 일년에 3편 이상의 영화를 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이완 맥그리거는 여름 시즌에만 무려 네 편이고, 죄다 주역이다. 게다가 라인업에 올라 있는 작품까지 살펴보면 나오미 와츠와 함께 한 스릴러 <스테이>가 10월에 개봉하는 기가 막힌 수준.
언제부터 이완 맥그리거가 헐리웃 메이져 채널에서 인기 높은 스타가 된 것일까? 물론 이완 맥그리거가 1급 스타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톰 크루즈나 톰 행크스같은 검증된 달러 박스도 아니고 최근 작품의 흥행 성적도 폭발적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헐리웃에서 흥행 파워로 흔히 기준 삼는 최근 세 작품 흥행 수익을 볼 때 <다운 위드 러브> <영 아담> <빅 피쉬>로 이어지는 그의 기록에는 메가 히트작이 하나도 없다.
블록버스터의 기준선으로 흔하게 쓰이는 전미 흥행 1억 달러 흥행작이 2000년 이후 출연작 중에 단 세 편 뿐이다.(<블랙호크다운>(2001), <스타워즈 에피소드 2>(2002), <스타워즈 에피소드 3>(2005)) 한마디로 헐리웃 영화사 중역진들이 선호할 만한 캐스팅 리스트에는 오르기 힘든 배우라는 이야기. 결국 올해 여름 헐리웃은 흥행성의 잣대 만으로 이완 맥그리거를 캐스팅하지는 않았다는 뜻이겠다.
미완의 흥행성, 스타성에 대한 기대
주연으로 나서면 1억 달러 이상의 흥행 수익을 보장한다는 헐리웃 흥행 쌍웅 두 톰(톰 크루즈와 톰 행크스) 정도의 지명도가 아님에도 이완 맥그리거는 올 여름 두 편의 대형 극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한 편은 이미 엄청난 흥행 수익을 거둔 블록버스터이며, 다른 한 편은 블록버스터급 수익을 노리는 대자본 영화다. 상품성을 보장할 수 없는 배우에게 주역을 맡길 수 있는 블록버스터란 어떤 영화일까? 영화가 주연 배우 이상의 흥행성을 가지고 있거나 주연 배우 이외에도 관객을 불러모을 지명도가 있는 배우나 스텦이 참여한 영화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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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한가운데에서 이완의 네번째 블록버스터 히트작이 될 가능성이 높은 <아일랜드>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에서 유안은 <스타워즈>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비중으로 출연하지만 여전히 관객에 대한 영향력은 <더 록><아마게돈><진주만>으로 이어지는 화끈한 액션 연출의 달인 마이클 베이와 나눠지고 있으며, 스캔들 메이커로 변모 중인 신예 스칼렛 요한슨 역시 이완과 비슷한 수준의 관객을 책임지며 <아일랜드>에 참여했을 것이다.
흥행력으로 제작자들이 이완 맥그리거에게 기대한 수준은 '아직 단독으로 흥행을 책임질 수 없는' 기대주 정도가 아닐까? 제작자들이 반신반의하며 블록버스터 히트작이 두 편 있는 (그나마 한 편은 스티븐 스필버그와 톰 행크스가 합작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 맷 데이먼을 단독 기용해 <본 아이덴티티>를 찍어 깜짝 성공시킬 때의 기대나, 흥행 성적이 블록버스터 급은 아니었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 <데스페라도>로 <어쌔신>에 이어 <마스크 오브 조로>의 주연을 맡긴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같은 기대?
영국인 배우의 프리미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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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영국인 남자배우라는 점.
헐리웃에서 영국 발음을 구사하는 남자 배우가 가지는 입지는 제법 크다. 널리 퍼져있는 관계로 방언과 독특한 억양이 수없이 존재하는 영어에 영국 발음이란 표준어와 같고, 중후한 이미지를 끌고 오기 마련이며 반드시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여야 하는 배역이란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미국 배우들끼리만 모아서 영화를 찍어도 고전극이라면 영국식 억양으로 영어를 구사하기 마련이니까.(충무로에서 시대극을 찍을 때 '시대극식 억양의 구어체 한국어'를 구사하는 것처럼) 제임스 본드가 영국 첩보원이기 때문에 영국 배우 중에서 배역 선정이 오고가며, 외모로는 게임 속 라라 크로프트 그 자체라고 했던 미국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가 캐스팅 당시 영국 모델 출신 배우 엘리자베스 헐리와 경합을 벌렸던 이유도 모조리 같다(라라 크로프트는 설정 상 옥스포드를 졸업한 영국 토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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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가 있다면 캐스팅 당시 <스타워즈>의 황당함을 매우 싫어해 속편을 고사했던 (그래서 결국 각본을 수정해 다스베이더와의 대결 후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늙은 오비완 케노비 알렉 기네스에 비해 <스타워즈>를 즐긴 세대에 속하는 이완 맥그리거는 자신이 오비완 역을 맡았다는 사실 자체를 너무나도 즐거워했다는 정도. 더구나 대선배이자 영국을 대표하는 명우였던 알렉 기네스를 의식한 이완은 자신이 맡은 젊은 오비완 케노비를 연기하며 오리지널 <스타워즈> 당시의 알렉 기네스의 말투를 흉내내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물론 영국계 배우기 때문에 가능한 디테일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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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의 세계에 사람같은 국경을 그어 놓는다는 설정은 생각에 따라 엉뚱한 면이 없지 않지만, 군인처럼 의인화한 비둘기라는 설정 자체가 비둘기 자체보다는 2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영국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뜻이겠다. 제목 <발리안트>는 주인공 비둘기의 이름과도 같은데, 호기있게 참전한 애송이 비둘기 캐릭터를 소화할 만한 영국인 스타(목소리 출연 만으로 흥행에 일조해야 하는 애니메이션에서 단순히 '배우'여서는 곤란하다)라면 선택의 폭이 그리 넓지는 않을 듯 싶다. 기껏해야 휴 그랜트나 주드 로, 이완 맥그리거 정도?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지만 휴 그랜트가 60년생으로 주드나 이완과 10년 이상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줄어들겠지.
믿음직한 프로페셔널
애니메이션의 평균 제작 기간이 3년 정도이고, 올해 개봉하는 <발리언트>와 <로봇>은 이미 2년 전에 캐스팅과 사전 녹음이 끝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여름 시즌에 몰려있는 이완 맥그리거의 영화는 그리 과중한 것은 아니다. 물론 부지런히 영화를 찍으러 다닌 점은 변함이 없지만. 그런데 찬찬히 살펴보면, 부지런히 찍을 수 있다는 것 역시 재능에 포함된다. 완성되었다기 보다는 기대주에 가까운 이완의 스타성과 헐리웃에서 프리미엄을 가지고 있는 영국인 배우라는 점 이면에는 부지런히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재능이 숨겨져 있다. 여름에 개봉하는 이완 맥그리거의 영화 중 <로봇>과 <아일랜드>는 그런 배우의 재능이 드러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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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 맥그리거는 다르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인이지만 미국식 억양의 영어까지 유연하게 구사하며, 평범한 얼굴은 아니지만 꽃미남 류는 아니기 때문에 배역에 제한이 없다. 특히 기본기가 튼튼하지만 과시적이지 않은 연기는 조연을 맡아도 모나는 법이 없다. 조화로운 연기에 능한 것은 리암 니슨이나 존 쿠색, 에드워드 노튼(물론 이 배우는 과시적인 연기도 능하지만)같은 동시대 배우나 선배 제다이 알렉 기네스가 가졌던 미덕이기도 하다. 덕분에 이완 맥그리거가 맡은 <로봇> 로드니는 도시로 떠난 애송이 로봇인데도 매우 자연스러우며, 절정의 순간 할 베리나 로빈 윌리엄스, 짐 브로드벤트같은 배우와 절묘한 하모니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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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복제 인간인 것을 모르는 와중에 음모를 목격하고 수용시설을 탈출한 링컨 식스 에코(이완 맥그리거)는 자신의 복제를 의뢰한 주인 톰 링컨(당연히 이완 맥그리거)을 만난다. 그때까지 미국 서부의 15세 청소년 수준에 맞춘 교육을 받았던 링컨 식스 에코는 일반적인 서부 억양을 구사하는 인물. 그런데 산업 디자이너 톰 링컨은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폭주족 생활도 좀 했던(아무리 봐도 이완 맥그리거 자신을 반영한 듯 한) 영국계 스코틀랜드 억양을 구사하는 인물. 링컨 식스 에코는 자신의 원작인 톰 링컨의 말투를 흉내내며 스코틀랜드 억양을 구사하는데, 톰 링컨은 "끔찍하니 하지 말라"며 링컨 식스 에코를 말린다. 이 장면은 하일라이트 때 유용하게 쓰이는 부분이지만, 이상은 스포일러가 될 터이니 생략. 같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유명한 숀 코너리가 사투리에 가까운 그의 강한 스코틀랜드 억양을 단 한 번도 고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그래서 거지역 따위는 절대 맡지 못하는) 이완의 재능은 더욱 빛난다.
연기력의 바탕을 마련하고 자신의 캐릭터를 성립하는 기간이 흘러 30대가 된 이완 맥그리거. 헐리웃 남자 배우에게 30대가 경력의 정점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네 편의 영화를 내놓은 이완 맥그리거의 여름은 관객에겐, 이완의 재능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