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상상해보자.
당신이 거리를 걷고 있는데 프루트 챈 감독이 빨간 닭꼬치를 먹으면서 당신의 옷깃을 스쳐 지나가거나 밤에 친구들과 포장마차에서 술을 먹는데 앞 테이블에선 박찬욱 감독이 조개구이를 굽고 있고 옆 테이블에선 술에 취해 얼굴이 홍당무가 된 박해일이 조덕배의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며는’ 을 부른다면…
상상일 뿐 아니냐고?
아니다. 10월 6 ~ 14일까지 이 곳에 오면 가능한 일이다.
영화와 바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우러진 축제의 향연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로 말이다.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앞서 밝힌 꿈 같은 얘기들은 필자가 작년 부산영화제 기간 중 겪었던 어느 하루 동안의 경험담을 쓴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일반 관객들뿐만 아니라 현장에 종사하는 전문 영화인들도 손꼽아 기다리는 영화제인 만큼 영화관에서 거리에서 식당에서 혹은 카페나 술집에서 쉽게 낯익은 영화인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런 우연적인 만남보다 확실한 만남을 원한다면 영화제 측에서 준비하는 영화인들과 일반 관객간의 공식적인 만남의 자리가 준비되어 있다.
김지운, 최동훈, 문소리, 유지태 등이 참여하는 ‘감독, 배우와 영화보기’ , 그리고 거장감독들의 영화인생과 그들의 전반적인 영화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 ‘마스터 클래스’ 가 마련되어있다. 올해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의 이란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마스터로 선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307편의 영화 중 티켓에 GV(Guest Visit) 표시가 있으면 영화가 끝난 후라도 절대 자리를 뜨지 말 것. 감독과 배우가 나와 무대인사를 하고 관객들과 질의응답 시간도 갖는다.
이 밖에도 ‘씨네마틱 러브’, ‘핸드 프린팅’, ‘오픈 토크’ 등과 같은 다양한 이벤트들이 준비되어 있지만 무엇보다도 영화제의 꽃은 영화이다. 오랜 기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선별한 영화인만큼 해외 각국에서 초청된 다양한 색깔과 향기의 영화들을 그냥 지나칠 순 없다.
하지만 그 많은 영화 중 자신의 취향에 꼭 맞는 영화를 찾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막막한 영화여행을 떠나려는 당신!
걱정마시라! 무비스트가 여러분들께 소박한 안내서 하나를 선물하려고 한다.
이른 바 ‘부산국제영화제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부디 이 안내서로 인해 여러분들의 영화여행이 보다 알찬 여행이 되기를 바라면서...
떠나자! 신나는 영화여행 속으로…(자고로 여행은 목적지보다 누구와 동행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가족과 연인과 친구와 혹은 나 홀로 여행을 떠나려는 여러분들을 위해 함께하는 여행의 재미가 배가 될 수 있도록 동행하는 자를 고려하여 영화를 선별해 보았다.)
▶ 가족과 함께하는 훈훈한 감동의 여행
☞ 브로큰 플라워(Broken Flowers)
월드시네마/2005/105분/감독 짐 자무쉬/출연 빌머레이, 줄리 델피, 샤론 스톤
‘천국보다 낯선’을 만든 짐 자무쉬 감독의 ‘브로큰 플라워’는 독신남 돈 존스턴이 어느 날 우연히 자신에게 열아홉 살짜리 아들이 있다는 익명의 편지를 받음으로써 자신의 과거의 여인들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그린 로드 무비이다. 돈의 여행길에는 훈훈한 유머와 감동이 곳곳에 숨어있다. 특히 이 작품은 주인공 돈 역을 맡은 빌 머레이를 비롯하여 샤론 스톤, 제시카 랭과 같은 쟁쟁한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 몽골리안 핑퐁(Mongolian Ping Pong)
아시아 영화의 창/2004/102분/감독 닝 하오/출연 이데신나리부
이 영화는 바깥 세상과 격리되어 살아가는 몽골의 유목 민족 아이들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탁구공을 우연히 줍게 됨으로써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 작품이다. 특히 그 공이 ‘중국의 국구(國球)’라는 것을 알고 중국의 수도에 돌려주어야겠다고 결심한 뒤 북경으로 향하는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흐뭇한 미소와 함께 잔잔한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 별이 된 소년(Shining Boy and Little Randy)
오픈 시네마/2005/113분/감독 카와케 슈운사쿠/출연 야기라 유야
가을바람과 바닷내음이 향긋한 수영만 요트경기장 야외 극장에서 상영하는 오픈 시네마는 가족들과 함께 훈훈한 감동을 느끼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이다. ‘별이 된 소년’은 코끼리와 우정을 나눈 한 소년의 감동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가족 영화이다. 2004년 칸 영화제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야기라 유야가 주인공 테츠무로 나온다. 여기에 음악을 맡은 류이치 사카모토의 매혹적인 선율이 영화와 더불어 깊은 가을, 밤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을 것이다. 단, 바닷바람이 꽤 쌀쌀하니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두터운 외투를 챙겨 가는게 좋다.
▶ 연인과 함께하는 달콤 혹은 쌉싸름한 여행
☞ 청소부 시인(Poet of the Wastes)
뉴커런츠/2005/81분/감독 모함마드 아흐마디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PPP(Pusan Promotion Plan) 선정작인 이 작품은 시인을 꿈꾸는 한 청소부가 우연히 쓰레기 봉지 속에서 편지를 발견하고 편지 속 여성을 추적하는 내용이다. 그녀의 쓰레기를 열어보며 그녀의 행적을 상상하는 청소부. 고단한 하루를 버티게 하는 시와 그녀는 그가 삶을 살아가는 유일한 희망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고 시와 그녀에 대한 낭만적인 사랑은 쓸쓸히 최후를 맞이한다.
☞ 5*2
월드 시네마/2004/90분/감독 프랑수아 오종/출연 발레리아 부르니 테데스키
5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독특한 제목 ‘5*2’는 프랑스 영화계의 젊은 악동 프랑수아 오종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박하사탕’, ‘돌이킬 수 없는’과 같이 내용이 역순으로 진행되는 형식의 작품으로서 오종 감독은 주인공 부부의 결혼생활을 역순으로 되짚어 간다. 결혼이 깨지는 도입부에서부터 시작해 그 커플이 함께했던 세월 중 가장 행복하고 잔혹했던 순간들을 펼쳐놓는다. 오래된 연인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의 영화이다.
☞ 더 차일드(The Child)
월드 시네마/2005/100분/감독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출연 제레미 르니에르
2005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다르덴 형제의 ‘더 차일드’는 이전에 그들이 연출했던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 경력에 부응하듯 ‘아들’에 이어 또 한번 집요한 관찰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덜컥 애를 낳아버린 철부지 연인의 전전긍긍하는 모습들과 그들이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큰 사건을 힘겹게 해결해나가며 성숙해가는 이들을 묵묵히 카메라에 담음으로써 다르덴 형제는 우리들에게 가족과 인간적인 윤리를 묻는다.
▶ 친구들과 함께했던 그 시절… 성장의 영화들
☞ 린다 린다 린다(LINDA LINDA LINDA)
아시아 영화의 창/2005/114분/감독 야마시타 노부히로/출연 배두나, 마에다 아키
다섯 명의 소녀는 학교 축제에서 자신들의 노래를 연주하기 위해 맹 연습 중이다. 그러나 멤버 한 명이 부상을 입게 되어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되고 급기야는 연주를 포기하게 된다. 이 때 보컬로 한국인 유학생 송을 섭외함으로써 연습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축제까지 남은 기간은 단 삼일. 이 영화는 평범한 소녀들이 그 삼일 동안 성장하는 과정을 소박한 리얼리즘으로 그려낸다. 한국인 유학생 송으로 나오는 배두나의 쿨한 매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평소 배두나의 팬이었던 노부히로 감독은 캐스팅을 위해 봉준호 감독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 용서 받지 못한 자(Unforgiven)
뉴 커런츠/2005/122분/감독 윤종빈
올 해 독립장편영화 가운데 최고의 수확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이 작품은 특히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킬만한 작품이다. 줄거리는 태정의 군대 시절 후임이자 중학교 동창인 현역군인 승영이 태정이가 제대하자 기댈 곳을 잃은 채 군대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고 변해간다는 내용이다. 승영의 억눌린 충동을 간결한 편집으로 재구성하는 감독의 연출력이 눈부시다.
☞ 사랑이 찾아온 여름(My Summer of Love)
영국영화 특별전/2004/86분/감독 파웰 파우리코우스키/출연 나탈리 프레스, 에밀리 블런트
찌는 듯이 더운 여름 날, 평범한 노동자 계급의 말괄량이 소녀 모나와 이국적인 중산층 여학생 탐신이 요크셔의 작은 마을에서 마주치게 되고 그들의 만남은 계급과 성적 편협성의 벽을 뛰어넘으며 진실한 우정의 관계를 맺게 된다. 10대 소녀들간의 섬세한 소통을 다룬 성장 드라마인 이 영화는 영국 영화의 색깔이 잘 묻어나는 아주 깔끔하고 유니크한 소품 같은 영화이다.
▶ 진정한 자아를 찾아 떠나는 나 홀로 영화여행
☞ 쓰리 타임즈(Three Times)
개막작/2005/135분/감독 후 샤오시엔/출연 장첸, 서기
‘쓰리 타임즈’는 세 시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당구장 여종업원과 군인 청년의 애틋한 로맨스를 담은 1편 ‘연애몽’, 감독의 관조적인 롱테이크를 확인할 수 있는 2편 ‘자유몽’, 그리고 3편 ‘청춘몽’에서는 현대 대만 사회 청춘의 삶을 감각적인 스타일로 묘사한다. ‘밀레니엄 맘보’에 이어 다시 한번 후 샤오시엔의 작품에 출연한 서기와 왕가위가 총애하는 장첸의 성숙한 연기가 돋보인다.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되는 버전은 칸 영화제 상영 후 재편집을 거친 최종본이다. 감독의 연륜이 묻어나는 이 작품을 통해 관객들은 자신을 뒤돌아 볼 수 있는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 흔들리는 구름(The Wayward Cloud)
아시아 영화의 창/2005/114분/감독 차이밍량/출연 이강생, 첸샹치
올 해 베를린영화제 상영 당시 농도 짙은 섹스 묘사로 인해 포르노 영화라고까지 소개되며 극단의 평가를 받았던 화제작 ‘흔들리는 구름’은 혼자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에게는 더없이좋은 기회이다. 가족과 연인과 함께 보기에는 낯뜨거운 민망함을 감수해야 할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단순히 야한 영화로 매도해 버리기에는 이 영화가 갖고 있는 미덕이 너무도 많다. 질펀한 섹스씬과 키치적 상상으로 가득찬 환상적인 뮤지컬 장면들이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묘한 정서적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매혹과 전율의 순간들이다. 마지막 장면 역시 올해 최고의 충격적인 엔딩 중 하나이다.
☞ 빅 리버(Big River)
새로운 물결/2005/105분/감독 후나하시 아츠시
이 영화는 각기 다른 이유로 미국 아리조나 사막을 여행하던 중 우연히 만나게 된 역시 다른 국적의 세 남녀의 여정을 그린 로드 무비이다. 인종과 문화 장벽을 극복하며 친구가 되어가는 그들의 소통과정이 광활한 그랜드 캐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누구나 꿈꿔온 낯선 곳에서의 낯선 만남. 낯선(?)곳에 홀로 온 당신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