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은 관객의 영화선택 조건을 바꿔 버린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 이병헌, 이영애가 출연하더라도 <컷>, <친절한 금자씨>는 박찬욱 감독이 ‘만든’ 영화다. 우린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본다. 아시아를 점령한 한류스타가 나와서가 아니라 박찬욱이 연출한 영화라서 그의 영화를 애타게 기다리고, 내 돈 써가면서 극장까지 굳이 찾아가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한국관객의 영화소비 행태를 변화시키면서 관객을 소급할 수 있는 ‘스타’ 감독이다. 한 명의 스타로서 이해되는 신드롬을 일으킨 그가 자신의 영화보다 타인이 만든 영화를 강력추천하며 홍보맨을 자청했다. 그에 대해서 많은 것을 궁금해 하던 관객과 팬들은 박찬욱이 왜 다른 이의 작품을 최고라 말하며 얼굴마담 노릇을 하는지, 그 사연을 알고 싶어 21일 종로3가 낙원상가 옥상에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발 디딜 틈도 없다는 말은 이런 걸 두구하는 말인가 부다. 질식사 일으킬 정도로 서울아트시네마 홀에 콩시루를 이루며 들어선 관객들. 서울아트시네마가 소격동에서 낙원상가로 이사한 이래로 최고로 많은 관객들이 이날 동시에 여기를 방문한 기록을 세웠다. 오직 박찬욱 감독을 만나기 위해서, 그가 정말로 재미다고 여기저기서 떠들고 다닌 돈 시겔의 <킬러>가 궁금해 모여든 것이다.

그 안에 모가 들어있을까? 궁금증을 일으키는 검은색 가방을 이날도 여지없이 메고 빠른 발걸음으로 무대에 올라온 박찬욱 감독.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는 그를 ‘B무비 전도사’라 간단명료하게 정리했다. 언론매체를 통해 박찬욱이 영화 만드는 것만큼 영화보기를 즐겨하는 영화광이란 사실은 모두 인지한 상태. 더불어 그의 취향이 ‘B무비’라는 것도 어느 정도는 알려진 일이다.

박찬욱은 “배우 ‘리 마빈’의 팬이다. 그가 출연한 영화는 모두 모을 생각이고 모으고 있는 와중이다.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 돈 시겔의 <킬러>는 배우 리 마빈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준비한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 여기서 잠깐!

김성욱 프로그래머는 무비스트와의 짤막한 인터뷰를 통해서 “어제 한숨도 못 잤다”고 고백했다. 그 이유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통장도 아닌 대표를 맡은 박찬욱이 선택한 영화가 <킬러>의 필름상태가 가장 좋지 않아서다. 주어진 여건 하에서 백방으로 애를 썼지만 구해 온 필름이 붉은 빛이 심하게 감도는 상태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더라. 박찬욱 감독은 자신이 선택한 영화를 최고는 아니더라도 최상의 상태에서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지 못한 점을 아쉬워하며 더욱 더 친절하게 관객들과의 만남을 준비했다고 한다.

“이 영화의 파워는 엄청나다. B무비 특유의 힘을 느껴보시길 바란다.”

돈 시겔의 <킬러>(1964년)는 B무비의 시조라 일컬어지면서 수많은 영화광들을 열광시킨 작품이다. 리 마빈, 앤지 디킨슨, 존 카사베츠 등 지금은 전설로 남아있는 멋진 배우들이 총출동한 영화기도 하다.

“배우 리 마빈은 게으른 연기자다. 그런데 그가 영화 안에서 보여준 이미지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아우라를 가졌다.” 영화에 대한 애정을 증명이라 하듯, 배우와 영화의 여러 배경을 막힘없이 술술 풀어나가는 그의 조곤조곤한 언변에 모두 넋을 잃고 빠져 있을 때, 엉뚱 소녀가 마이크를 들고 행사장 분위기를 순식간에 변화시켜 버렸다.

“감독님 보기 위해서 여기에 첨 왔어요. 이런 영화도 처음 보고요. 자막이 테이프로 붙인 것처럼 나오는 게 가장 먼저 눈에 띄네요. 감독님? 제 얼굴을 3초만 봐주세요. 3초만 보고 저한테 가장 어울리는 배역을 골라주시면 어떤 역할이 어울릴 것 같나요?”

두서없는 소녀의 질문에 평소 냉정함을 잃지 않기로 유명한 박찬욱 감독 몇 초간 말문을 못 열고 연신 앞에 놓인 생수만 들이킨다. 그를 이렇게까지 당황스럽게 만든 소녀, 그녀는 3초를 위해서 박찬욱 감독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장내는 웃음바다지만 소녀는 침착하게 대답을 기다리고 박찬욱은 당황함에 대답을 찾지 못한다. 박찬욱 감독은 끝내 대답을 못했고, 다른 재미난 영화 이야기로 자신에게 예고 없이 들이닥친 위기의 순간을 간신히 모면했다.

장하다 소녀여!! 박찬욱 감독의 귀여운(?) 인간미까지 끌어내 이날 만남을 더욱 더 빛내 준 소녀에게 무비스트는 베스트 관객상을 수여함은 물론이고 관객과의 대화를 풍요롭게 해줘 주최측의 감사패를 기사로 대신 전해준다.

“류승완보다 관객이 적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렇게 많이 찾아줘서 감사합니다.” (‘충격의 복도’를 추천한 류승완 감독과의 관객대화시간이 예정된 일요일 표는 이날 완전매진을 기록했다.)

박찬욱의 장난스런 걱정은 관객들에게 박찬욱을 훨씬 더 가깝게 여기는 계기가 됐다.

그에게 질문 한 번을 하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고 1시간 가까이 마련된 관객과의 대화 시간은 눈 깜작할 새 지나가 버려 팬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킬러>의 명대사, “시간이 별로 없어요”처럼 끝나버린 박찬욱 감독과의 만남은 토요일 밤에 어울리는 추억을 남기며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를 풍성하게 채워준다.

박찬욱에게 영화란 무엇인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를 흥분시키는 남의 영화를 볼 때마다 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힘과 동기부여가 된다”

시네마테크가 어떤 기능을 담당하는 곳인지 잘 몰라도 된다. 그러나 우리가 박찬욱 감독 영화를 좋아한다면 그가 영화를 계속해서 만들게끔 도와줘야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 ‘서울아트시네마’는 박찬욱이 영화를 의욕적으로 만들도록 끊임없이 자극을 주는 유일한 공간이다. 그러니 그가 어떤 영화를 볼 때 주체 못할 정도로 창작 욕구를 느끼는지 좀 알아두면 좋지 않을까? 알아두면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나니.........

취재: 최경희 기자
사진: 권영탕 사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