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발탄> 이후 한국영화계의 대표감독이 된 노장 유현목 감독의 1965년 작인 <춘몽>은 한국영화로서는 보기 드물게 표현주의적이고 실험적인 영상과 사운드를 자랑하는 영화. 지난 2004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통해 사운드가 소실된 마지막 10분을 창조적으로 복원, 상영한 이후, 새로워진 <춘몽>은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이라는 야심찬 기획천을 통해 두 번째로 관객들과 만나는 중이다.
이 만남을 주선한 사람은, 2006년 서울아트시네마가 선정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중 한 명인 김홍준 감독. 영화 <춘몽>의 복원을 주도했던 바로 그 얼굴이다. 영화, 글, 그리고 8년 간의 영화제를 통해 수많은 영화팬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그를 만났다. <춘몽>의 두 번째 상영이 있던 토요일 아침, 서울아트시네마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의 얼굴은 다소 야위어 있었다.
“엊그제 <춘몽> 첫 상영한 날이 최근 첫 외출이었어요. 일주일간 입원해 있다가 나와서.”
그러고 보니 혹자들이 김홍준 감독이 풍기는 ‘지적 매력의 결정체(?!)’라고 말하는 눈 밑의 ‘다크 서클’도 조금 더 진해진 듯 보인다. 그러나, 영화 <춘몽>과 영화제, 시네마테크와 고전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터뷰 내내, 그에게서 ‘환자의 피로함’ 따위는 발견할 수 없었다. 영화에 대한 충만한 애정을 느꼈을 뿐. 심지어 수차례 좌중에 엄청난 폭소탄을 던져놓고도 자신은 절대 웃지 않는 모습에서 고강한 ‘코미디의 포스’마저 풍겼으니, 그 많은 이야기를 다 옮길 수 없음이 ‘천추의 한’이 될 지경이다.
“영화제는 공동체가 되어야죠.”
시네마떼끄의 친구로서, 그가 젊은 관객들에게는 생경하기만 한 영화 <춘몽>을 ‘함께 보자’며 추천한 이유는 간단했다. 영화제는 영화와 관객, 영화인들이 서로 교류하고 소통하는 일종의 네트워크로써 기능해야 한다고 믿는 그에게 <춘몽>은, 한국영화의 드문 판타지 작품으로써, 그러한 네트워크의 기반이 되어줄 훌륭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영화제는 단순히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 아니라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그래야 영화제가 생명을 가진다고 생각해요. 옛날에는 영화제가 단순히 못 보는 영화를 보기 위한 것이었고, 그런 기능은 아직도 있지만, 점점 더 약화되고 있어요. 영화제가 아니어도 영화는 다 볼 수 있으니까. 그런데 영화제가 진짜 해야 되는 일 중의 하나가 멋진 영화들을 발굴하고, 여력이 있으면 복원도 하고, 회고전을 통해서 조명도 하고, 그런 거예요. 이런 것들은 영화제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게다가 <춘몽>은 한국고전으로는 드문 판타지영화거든요.”
실제로 <춘몽>이 상영되던 극장 안에는 40년 전 만들어진 실험적 판타지를 보며 한껏 즐기는 관객들의 웃음소리와 흥분이 가득했다. 상영이 끝난 후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도 유쾌하긴 마찬가지. <춘몽>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공개될 때마다 관객들은 박수와 웃음, 탄성으로 공감을 표했다. 김홍준 감독의 바람대로, 영화와 관객, 그리고 그 작품을 만들고 추천한 영화인이 영화제를 통해 소통, 교류하는 순간이 마련된 것이다. 그것은 영화제가, 나아가 시네마테크가 필요한 이유를 확인시켜주는 순간이기도 했다.
“시네마테크는 독립운동이다.”
그러나 자본이 모두를 접수한 시대, 돈이 될 수 있는 새로운 것과 빠른 것만이 각광을 받을 뿐, 소통과 교류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홀대받는 지금, 어쩌면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시네마테크의 존재는 혹자들에게 시대착오로 보일지도 모른다. 시네마테크는 상업영화를 만들어내는 것도, 상영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의 것들보다 지나간 것들에 더 많은 애정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재경부 차관이 대놓고 “스크린쿼터는 집단이기주의다”라고 발언을 하는 시대'라는 이야기에 김홍준 감독은 단호하면서도 유머넘치는 반론으로 시네마테크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시네마테크가 존재하는 거죠. 옛날에 김현 선생님이 ‘문학이 왜 필요한가’에 관한 글을 쓰신 적이 있었는데, 특히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이익을 추구해야 되고, 상업성이 있어야만 존재하는데 문학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상업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존재한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하셨죠."
자본의 시대에 역행하기 때문에 더 의미 있는 문학처럼, 시네마테크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많은 영화인과 관객들이 영화제와 시네마테크를 통해 영화에 대한 애정을 재삼 확인하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그의 이러한 지적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보다 명확해진다. 하여, 그는 시네마테크가 더 많은 곳으로부터 더 당당하게 후원을 받아, 더 멋진 프로그램으로 관객과 영화를 이어주기를 바란다.
“시네마테크는 후원받는 것을 부끄러워할 게 아니라, 자랑스러워해야 해요. 가령, 독립운동에 비유하는 건 좀 웃기지만, 드라마를 보고 있다고 칩시다. 일제시대에 친일파 집에 독립군이 들어와서 ‘돈 내놔’하고 당당하게 들어와서 돈을 가지고 나가면서, 증서 딱 써주고 ‘해방되면 갚겠소’하고 표표히 사라지잖아요. 이 독립군이 시네마테크인 거예요. 그런데 독립군이 들어와서 ‘저기 대단히 죄송하지만 독립운동을 하는데, 우리가 생각은 좀 다르지만 독립운동도 다양성을 위해서 필요하지 않겠어요? 당신은 친일파이고 난 아니지만 다 이해합니다. 당신은 땅도 많고 난 독립군이니까 좀 도와주시면 고맙게 생각하겠습니다. 나중에 좋은 세상 오면 도와주셨다는 걸 밝혀서...’ 이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더 당당해졌으면 좋겠어요. 물론 시네마테크를 지원하고 키우는 것이 왜 중요한지 그 인식을 좀더 폭넓게 확산시킬 필요는 있겠죠.”
“서울에 시네마테크를 허(許)하라!”
<춘몽> 복원의 후일담으로 넋을 빼더니, 연이어 독립군이 된 시네마테크를 실감나게 연기(?)해 대폭소를 터뜨려 버린 김홍준 감독. 그러나 웃느라 허리를 잡고 쓰러져 가는 기자들을 앞에 앉혀 두고도 그는 얼굴색 하나 변치 않는다. 전부터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같은 행사가 계속 있었으면 했다는 김홍준 감독은 앞으로도 이 같은 행사가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며 말을 이었다.
“외국 영화제에는 이런 프로그램들이 많이 있어요. 준비는 굉장히 힘들지만 잘한 거예요. 용기있는 행사고 다행히 사람들도 많이 왔고. 리얼판타 이래로 사람들이 제일 많은 것 같아요. 아닌가? (웃음) 이런 걸 자주 하면 좋겠어요. 한 달에 한 번이든 분기별이든. 이거야말로 영화인과 관객과 씨네마테크가 함께 모여서 공동체를 만드는 거잖아요. 그런 감독들이 있고 배우들이 있기 때문에, 대기업들이 자기네 영화 아니라고 해서 자기네 극장에 안 거는 대기업답지 않은 짓을 해도, 한국영화계가 건강할 수 있는 거죠. 누군가 속 좁은 짓을 하는 한 쪽에서는 돈 안 되는 일임에도 나서서 작품선정 하고 글도 쓰고 영화관객을 만나잖아요.”
‘쪽팔렸을 텐데’ 나서서 글까지 직접 쓴 감독과 배우들에게 감사를 표한 그는, 아프고 바빠서이긴 했지만 <춘몽>에 대한 소개글을 직접 쓰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나보다. 해서 <춘몽>의 첫 상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 ‘친구들 영화제’에 부치는 슬로건 하나를 구상했다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기사 제목으로 뽑아도 된다며 그가 전해준 슬로건은 “서울에 시네마테크를 허(許)하라!” 반드시 느낌표가 붙어야 하는 이 말의 의미인 즉슨, 이러하다.
“‘허하라’는 말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죠. 없는 것을 만들어 달라는 의미가 있고,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의미도 있고. 그리고 이 ‘허하라’는 것은 여러 사람에게 하는 말이에요. 영화인들에게도 하는 말이고. 지원할 의무가 있는 정부나 대기업에도 하는 얘기고. 무엇보다도 관객들에게 하는 얘기죠.”
“고전영화는 사투리 같은 것”
영화인들에게, 정부와 대기업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시네마테크를 허(許)해 줄 것’을 요청한 그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관객을 존중한다. 언제나 모든 일에서 관객의 책임은 마지막이라고 설명하는 그는, 숫자놀이에 매진하는 작금의 영화판의 책임 역시 상업영화 시스템과 언론, 영화인의 책임이 크다고 말한다. 관객은 언제나 영화를 통해 즐거움과 위안, 삶의 성찰을 얻으려 할 뿐, 주목적이 ‘숫자’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때문에 고전영화를 위주로 소개하는 시네마테크 역시 관객과 소통할 여지는 많다고 본다. 그저, 관객들이 시네마테크를 통해 만나는 고전영화들을 더 이상 낯설어 하지 않기 위해 약간의 요령이 필요하다고 귀띔했다.
“고전영화에 선뜻 다가가게 안 되는 이유는 요즘의 영상언어랑 다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그 다름이, 요즘의 영상언어는 한국어고 옛날 고전영화의 영상언어는 영어고, 이렇진 않아요. 비유하자면 사투리 정도죠. 표준말에만 익숙하다가 사투리를 들으면 처음엔 어색하고 이해가 안 가지만... 사투리에는 ‘맛’이 있잖아요? 그런 거죠. 그렇게 생각하고 접근하면 될 것 같아요. 사투리도 자꾸 듣다보면 흉내도 내고 나중엔 말도 할 수 있게 되잖아요.”
무릎을 치게 하는 비유다. 사실 문법이 좀 다를 뿐, 고전이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실제로 아트시네마의 팬들 중 다수는, 고전을 통해 영화와 일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됐다고 고백하고 있다. 부담감을 털어내고 나면, 의외의 감동으로 관객의 심금을 울리는 영화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주고 있지 않던가.
“고전이라는 말 자체가 주는 중압감 때문에 영화를 즐겁게 보는 게 아니라 마치 공부하고 분석하면서 봐야될 것 같고, 옛날 거니까 낡은 것 같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냥 영화로 보면 되는 거죠. 영화로. <춘몽>을 만약에 한국영화를 전혀 모르는 외국관객에게 보여준다면 언제 만든 영화인지 모를 거예요. 중요한 건 영화라는 것이고, 고전영화를 보는 특별한 방식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영화를 보는 자기 나름의 방식을 따라 보다보면 자기에게 맞는 것이 있고, 그런 맥락인 거죠.”
영화감독 김홍준의 두 가지 꿈
김홍준 감독은 말한다. 숫자놀이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그 시간에 시네마테크를 키우는 일이라고. 더 많은 사람들이 시네마테크의 필요와 효용성을 인식해 큰 규모의 지원이 당연한 풍토를 만드는 일이라고. 그리하여 그는 다시 한 번 <춘몽>을 통해 관객과 만날 것을 꿈꾸고 있다. 비용과 시간의 문제로 인해 컬러필름에 흑백으로, 5.1채널로 기획했으나 결국 모노사운드로 프린트된 현재의 <춘몽>을 재복원하여 흑백필름에 디지털 5.1채널로 만들어 관객과 만나는 것. 그것이 관객화의 대화자리에서, 그리고 인터뷰 초입부터 그가 밝힌 소원이었다. 와병을 털고 일어나 한국영화와 관객에 대한 애정을 한껏 과시했던 그가 빠른 시일 안에 그 소원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그 전에, 오래 기다린 팬들을 위한 그만의 영화도 어서 선보이기를 기원함은 물론이다.
“한참 정신없이 바쁘던 일들이 끝나고 나니까 긴장이 풀어졌는지 아프더라구요. 그런데 요즘 아프고 나서 그런지, 이제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아직 정해진 건 없는데,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본업으로 돌아가는 거지, 뭐.”
감독님! 장난스런 액션으로 사진촬영에 임하며 했던 그 말씀,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취재: 이지선(프리랜서) 최경희 기자
사진: 권영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