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중국식 CG무협은 <무극>에서 정점에 이른 듯 했다. ‘인간 연날리기’라는 초유의 신공을 보여 관객을 경악시켰던 <무극>의 여파로 인해, 사실상 중국식 무협 블록버스터라고 하면 일단 착잡해지는 기분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중국의 스필버그’라는 펑샤오강과, <매트릭스>의 무술감독 원화평, 그리고 <연인>에서 좀비와 순정녀를 오갔던 장쯔이가 만났다는 영화 <야연>을 마주함에 있어, 선입견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두려움 반 기대 반이었다고 할까?
그러나 결론부터 말해, ‘이번엔 또 뭘로 어이없어질 것인가’라는 이상한 양가감정은 더 이상 품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영화 <야연>은 분명 기존 작품들의 대를 잇는(?) 중국적 판타지 무협 로맨스물이지만, 죽었다 살아나는 캐릭터나, ‘인간 연날리기’의 황당한 상상력은 자제되었다. 스펙터클을 위해 남발되던 CG도 상대적으로 상당히 절제되었다. 물론 그림은 여전히 아름답다. <연인>과 <천리주단기>의 촬영감독, <와호장룡>의 미술감독, 그리고 <영웅>과 <매트릭스>의 무술감독이 힘을 모아 만들어낸 영상은 유려함의 극치다. 아름다운 색감의 화면 속에서 무용처럼 펼쳐지는 액션장면은 그야말로 판타지 그 자체, 보는 즐거움이 만만치 않다. 더불어 다행스러운 것은, 영화 <야연>이 그간 지겨울 정도로 지적되어 오던 이야기의 한계 문제를 상당부분 극복했다는 점이다. 그림에 집착해 휘청거리던 중국 무협 블록버스터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던 펑 샤오강은, 블랙코미디를 조율해내던 탁월한 솜씨로 영상과 이야기가 절룩거리던 기존 작품들의 단점을 살짝 비껴간다.
이채로운 사실은, 이야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펑 샤오강이 끌어들인 것이 서구의 고전 <햄릿>라는 점이다. 당나라 패망 이후 혼란의 중국역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의 뿌리는 영국작가가 그린 덴마크의 왕실에서 가져왔다. 물론, 시대와 배경이 달라졌으니 셰익스피어의 묘사 그대로 등장하면 곤란한 일일 터. 펑 샤오강은 전통적 햄릿의 연인 오필리어를 삭제한 뒤, 이야기를 새 황제와, 황후, 그리고 전 황제의 아들의 삼각관계로 집중시킨다. 즉, 햄릿이 오필리어 대신 계모를 사랑하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셰익스피어의 왕비와 오필리어가 그저 순정적 희생자의 위치에만 있었던 것과는 달리, 펑샤오강의 오필리어이자 왕비인 황후 완은 무용(武勇)을 겸비한 인재인 동시에 자신의 사랑과 권력을 지키기 위해 움직일 줄 아는, 보다 적극적인 인물이다. 흥미로운 변화다.
오래된 서구의 고전은 이렇게 중국식 무협 블록버스터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배신과 음모, 권력을 향한 쟁투가 끝없이 벌어지는 궁중의 폐쇄적 한계 속에서 세 남녀의 동상이몽은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끝없이 권력을 욕망하더니 이내 사랑까지 소유하고 싶은 남자와, 모든 것을 빼앗긴 뒤 마지막 복수를 꿈꾸는 남자, 그리고 사랑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여자의 이야기가 화면 속에 꿈틀거리고, 어긋난 세 남녀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생동감이 느껴진다. 특히 기어이 좌절되는 욕망 속에서도 끊임없이 갖지 못한 것을 열망하는 권력의 화신 리를 연기한 배우 유게는 매력적이다. 표정, 동선, 어느 하나 흠 잡을 곳이 없다. 아름다운 뒤태까지 보이며 유혹적이고 순정적인 팜므파탈을 연기해낸 장쯔이의 연기도 한결 성숙해진 느낌이다. 아름답고 착하기만 한 연인에서 욕망을 가진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오필리어의 표정은 묘하게 중성적인 장쯔이의 얼굴선을 만나 색다른 질감을 얻었다.
완벽한 플롯도 아니고, 감정묘사의 디테일과 속도가 다소 아쉽긴 하지만, <야연>이 보여주는 흥미로운 이야기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서구의 클래식과 중국 무협액션의 클래식(또는 클리셰)이 돼 가는 기법들을 모아 실존 대신 욕망을 이야기하는 영화 <야연>은 중국 무협 판타지의 가능성을 새로이 확인시킨다. 절제와 변용의 미덕을 아는 감독을 만났을 때, CG 무협의 볼거리가 갖는 폭발력은 배가 될 수 있다. 영화 <야연>은 언젠가 전 세계 영화팬들이 중국식 무협 판타지를 보며 “걸작이다!”라고 박수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어쩌면 미망)섞인 기대를 품게 한다. 그때가 언제냐고? 글쎄, 그건 각자 영화를 보며 가늠해 보시라.
글_ 이지선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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