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우아한 삶을 꿈꾼다. 유명한 모 디자이너 선생의 말처럼 ‘엘레강스’한 삶을 꿈꾸는 건 비루하고 천박한 삶을 살아간다는 소시민도 한번쯤은 해봄직한 ‘알음다운’ 상상이 아니던가. 사실 <우아한 세계>는 그 상상이 지닌 소시민적 천박함에 가깝다. 아름답고 싶지만 ‘알음다울’ 수밖에 없는 짝퉁표 바람인 셈. <우아한 세계>는 아버지들의 사회 체계를 조폭으로 상정하는 약육강식의 밀림으로 우회함으로써 오히려 그 세계의 비정함과 벗어날 수 없는 속박의 강요를 체감하게 한다.
새끈한 정장 차림에 광채 나는 외제 중형차를 모는 강인구(송강호)는 어디 그럴듯한 회사의 사장님쯤 되어 보인다. 하지만 그가 하는 일은 강제로 계약서에 지장을 찍게 해서 건설회사의 하청계약권을 따내고 자신이 모시는 속칭 회장님께 물어다드리는 것. 그 비류한 삶에서 그는 스스로 감탄한다. “참 아름답다. 아름다워.” 그는 밖에선 나름 90도 허리숙인 인사도 받는 그럴듯한 형님이지만 집에서는 아내의 바가지에 긁히고 딸내미의 질타를 얻는 힘없는 가장이다. 여기서부터 <우아한 세계>는 속내를 드러낸다. 조폭에 머무는 강인구의 이야기를 하지만 <우아한 세계>는 결코 조폭성안에 이야기를 한정짓지 않는다. 오히려 조폭의 세계 안에서 조폭과 거리감을 둔 제스처를 취한다. 까만 정장과 와이셔츠를 차려입은 조폭들과 회사원의 차이는 무엇인가. 광채 나는 흑빛 벤츠가 사장님의 그것들과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그들의 삶이 오리지널인가, 이미테이션인가의 문제다. 표면적으론 그럴듯하게 차려입었지만 내면적으론 천박하다. 하지만 가오상할 수 없는 형님이자 간지가 생명인 조폭의 인생에서 그들의 똥폼은 실제 삶과 무관하게 중시될 수밖에 없다. 이는 단지 조폭들만의 문제일까.
다시 <우아한 세계>로 돌아가자. 이곳에는 아버지가 있고 동시에 남자가 있다. 이 남자는 남들이 천박히 여길지라도 분명 하나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고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을 결판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건 분명 이 사회와 가정의 현실이다. 어머니들이 가정에서의 헌신을 강요당하는 것처럼 아버지들은 사회에서의 정치를 강요당하고 있다. 하지만 여자로 상정되는 어머니들이 그 희생을 동정으로 치환해냄과 달리 아버지들은 오히려 강압의 상태로 규탄당하고 핀치에 몰린다. 능력 없는 남자는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나 환대받지 못한다. 물론 그건 여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남성에게 능력은 하나의 의무이자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지침과도 같다. 그렇다면 그 능력의 기준은 무엇이던가. 결국 그건 모이를 물어다주는 능력이다. 이 사회에서 자식들의 모이를 물려줄 수 있는 가치의 환원은 돈, 즉 경제력이다. 결국 부자아빠가 되지 못한 이 시대의 가장들에게 현실은 술 권하는 사회가 된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는 훈훈한 광고 속 카피문구는 결코 편치 못하다. 그 속내에 자리 잡고 있은 건 자신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아비의 능력을 함양하기 위한 잔여가족의 내몰기적 속셈이 깔려있다. 그리고 아비는 그들의 삶을 부양하기 위해 사회의 정치성 안으로 몸을 던져야 한다.
강인구가 유일하게 심리적으로 안주할 수 있는 공간은 가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공간은 그를 가장 나약하게 만든다. 조폭들의 칼부림보다도 매서운 건 아내의 구박과 딸내미의 박대다. 그건 강인구가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지니게 되는 생에 대한 갈망보다도 도달하고픈 아비로서의 갈망 때문이다. 지켜야 할 자신의 울타리에 대한 부정(父情)이 그를 사지로 내몰고 그 곳에서 살아 돌아가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본능을 일깨운다. 결국 종래에 살육의 전장에서 돌아온 인구가 건지는 건 빈 집의 공허함과 홀로 남은 자의 초라한 여백이다. 결코 보장받을 수 없는 고행의 여정. 그건 아버지라는 속성이 짊어져야 하는 속박이자 벗어날 수 없는 인과율이다. 마치 존재에 대한 선택을 보장받지 못한 생의 출발처럼이나 가정이라는 집단의 생성이 잉태한 자식세대에 대한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부모세대로써의 의무인 셈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가장이라는 편치 않은 직위를 위임받아야 하는 남성의 비애감이 존재한다. 결국 강인구가 핏빛의 먹이사슬 속에서 분투한 뒤 손에 쥐게 되는 건 자신을 제외한 가족들의 행복하고 안락한 모습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다. 아비는 행복한 가족의 영상 밖에서 스스로 먹다 내던진 라면 면발같이 지긋지긋하게 불어터진 천박한 삶을 영위할 것이다.
“애비는 종이었다.” 필자는 <우아한 세계>를 보고 서정주의 ‘자화상’에 묘사된 아비의 상이 문득 떠올랐다. -물론 서정주 시인의 함의와 무관하게 개인적으로- 물론 모든 아버지들의 삶이 이리도 힘겹고 고단할까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반박할 자신은 없다. -필자는 아직 아비가 된 적이 없는 관계로- 하지만 천박한 현실 안에서 우아한 세계를 꿈꾸는 아버지들의 이상향이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가족이다. 그것이 과거 한국 사회에서 수줍고 무뚝뚝한 아비들이 짊어져야 할 과업이었으며 청산해야 할 애정인 셈이다. <우아한 세계>는 그 아비들이 꿈꾸는 이상향에 대한 진지한 고백임과 동시에 허탈한 토사물이다.
2007년 4월 6일 금요일 | 글: 민용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