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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그곳에 한 수영장이 있었더랍니다.
투발루 | 2001년 5월 18일 금요일 | 모니터 2기 기자 - 박우진 이메일

투발루 점점 따뜻해지는 기후 덕에 가라앉고 있다는 남태평양의 작은 섬, 투발루. 인간의 욕심이 불러온 재앙의 징후로 상징되는 섬. 그런데 지금, 누군가 투발루를 향해 가고 있다.

바람이 불면 쓸쓸하게 윙윙 소리만 저 혼자 맴돌 것 같은, 황량한 어느 땅 위에 마치 '성당'과 같은 건물이 우뚝 솟아 있다. 비가 주룩주룩 청승맞게 내리는 날, 한 사내가 건물 옥상에서 망원경을 눈에 들이대고, 화면에는 새 한 마리가 클로즈업된다. 관객의 폭소를 자아낼 만큼 조악한 그 새마저도 그저 날개를 갖고 있기에 부러워하는, 이 고달픈 표정의 사내가 바로 안톤(드니 라방)이다. 그는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어하지만 그에게는 세상의 흙을 디딜 수 있는 신발조차 없다. 맨발에 슬리퍼 차림으로 수영장(그 건물은 수영장이었다)이라는 작은 사회를 벗어나지 못한 채, 아버지의 권위와 억압에 복종하는 안톤은 그만큼 세상의 때가 덜 묻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눈 먼 아버지의 권위는 강력하다기보다는 오히려 가슴에 불어넣는 튜브와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서 불어대는 호루라기처럼 우스꽝스럽고 나약하며, 애처롭게 그려진다. 영화에 등장하는 기성세대는 대부분 이와 비슷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에바(슐판 하마토바)의 아버지나, 수영장을 찾는 할머니도 지팡이에 의지한 채 비틀거리며, 동정과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어른의 당당한 권위와 그들을 향한 존경과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설정은 기성세대의 퇴장과 신세대의 등장을 암시한다. 하지만 감독은 세대 교체의 과정을 과격한 투쟁보다는 온건한 조화로써 해결하고 싶은 것 같다. 안톤이 아버지의 그늘을 충분히 벗어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의 위태로운 권위를 지탱하는 역할 수행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기성세대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드러낸다.

수영장은 우리가 잃어서는 안 될 전통적인 가치를 상징한다. 옛 인물들의 초상화가 잔뜩 걸려있고,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이 허름하고 낡은 수영장. 하지만 밤이 되면 그 남루한 공간은 갈 곳 없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잠자리가 된다. ('성당'처럼!) 영화에서 수영장은 따뜻한 인간애가 넘치는 '고향'과도 같은 이미지로 나타난다. 입장료도 돈이 아닌, 단추로 받는다. 그래서 합리적인 신기술과 물질주의의 신봉자인 그레고어가 수영장을 파괴하려 할 때, 수영장 사람들 저항의 원동력은 바로 돈보다는 인간을 사랑하는 사회와 가난하고 불편하지만 끈끈한 인정이 넘치는 '고향'을 향한 절절한 향수에서 비롯된다.

에바가 물고기와 함께 물에서 노니는 환상적인 장면에서 우리는 희망을 감지할 수 있다. 그녀의 손놀림 하나 하나, 순수한 표정과 몸짓, 그리고 물고기의 하늘거리는 지느러미를 함께 담아내는 시선은, 물이라는 포근한 생명의 공간이 잉태한 약동하는 희망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장면을 훔쳐보는 안톤과의 사랑 또한 예감하게 한다. 물과 물고기가 희망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이미 [천국의 아이들]에서도 발견한 바 있다. 물에 담근 아이의 발, 그리고 그 발을 둘러싸던 물고기들. 그것 또한 상처의 치유, 그리고 생명력 넘치는 희망이 아니었던가. 마치 아이의 말간 웃음처럼.

제 이름으로 뚜렷하게 불려지는 등장인물이 에바와 안톤, 그레고어 뿐이라는 점은 지금이 과도기이며 사회 정체성의 중심이 새로운 세대로 옮겨가고 있다는 감독의 관점을 잘 드러낸다. 영화는 과도기의 혼란 속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투발루로 향하는 에바와 안톤으로 제시한다. 그들이 수행하는 역할은 아버지들이 품고 있던 소망을 해석하여 실현하는 것이다. 에바는 선장인 그녀의 아버지가 은밀하게 감추고 있던 지도를 손에 넣고, 안톤은 그의 아버지가 자부심으로 굳게 지키고 있던 '임페리얼'을 직접 다루게 된다. 길을 밝히는 여자와 추진력을 충원하는 남자. 서로의 꿈을 볼 수 있고, 그 꿈이 결국 하나였다는 사랑의 공감. 영화는 이러한 모습을 통해 구세대와 신세대, 남성과 여성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낸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 에바와 안톤은 시련을 겪어야만 한다. 에바는 순진하게도(!) 그레고어의 사악한 의중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안톤을 배신한다. 안톤은 길을 떠나기 위해 신발을 얻어야 했고, 처음 건너보는 신호등 앞에서 어리둥절해 한다. 길을 잃고 헤매다 멀리 돌아온 여자가 도리어 길을 안내하고, 걸음마를 너무 늦게 시작한 남자가 배를 움직인다? 우리와 닮은 불완전한 사람들, 덤벙덤벙 실수를 해대고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보통 사람이 이끌어가는 영화이기에 더욱 따뜻하다. 내 눈가에,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사뭇 배어나온다. 역시, 세상사는 방법은 시행착오의 연속으로 얻어지는 것인가 보다. 서투르게 살아가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아직 희망 품을 자격이 있나 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에바와 안톤이 티격태격 길을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더욱 인간답고 새로운 세상을 바라는 감독의 소망이 고스란히 녹아 들어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식의 전래동화 해피엔딩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결말을 단정짓는 것이 아니라 그 가능성만을 제시함으로써 오히려 관객에게 간절히 당부하는 것이다. 부디 여러분이 사는 현실에서도 '투발루'를 찾아 나서기를.

[투발루]는 신선하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영화의 매력이 단조로운 흑백 톤의 화면, 절제된 언어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오래 전 역사 속에 묻혀진 무성영화의 특징을 꺼내 먼지를 툭툭 털어 2000년 영화에 접목시켰더니 '신선하다'? 아이러니컬하지만 사실이다. 화려한 색채와 과학 기술로 이루어낸 휘황한 컴퓨터 그래픽, 웅장한 음향 효과. 우리가 발전된 영화라고 맹신했던 것들이 오히려 진부해져 버린 시대가 온 것일까. 잊혀진 옛 모습이 더욱 새롭게 두드러지는 것을 보면.

감독은 '옛 것과 새 것의 조화'라는 주제를 영화의 내용 뿐 아니라, 형식으로도 전달함으로써 이중의 효과를 거둔다. 또한 '투발루'라는 섬을 내세워 급격하게 발전(?)하는 과학기술과 그로 인해 척박해지는 인간의 삶, 파괴되는 자연에 대한 걱정을 드러낸다. 우리가 이 '말없이 웃기는 수영장 코미디'를 보면서 마냥 머리를 비울 수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에바와 안톤은 과연 무사히 도착했을까?

2 )
ejin4rang
기대되는군요...   
2008-10-17 08:42
rudesunny
기대됩니다~   
2008-01-14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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