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의 살해로부터 출발하는 <조디악>은 시작부터 잔인한 범행 현장에 관객을 동행시키며 심리적인 위축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피가 튀는 잔혹한 묘사는 156분에 육박하는 긴 러닝 타임 중 두세 차례에 불과하다. 쫓기는 자와 쫓는 자 사이의 심리적 거리감을 이용한 사이코 스릴러적 긴장감을 <조디악>은 크게 활용하지 않는다. 사실 <조디악>은 쫓는 자들의 이야기다. ‘그 놈의 두 눈을 똑바로 보고 범인을 잡았다는 확신을 얻고 싶다’는 그레이스미스(제이크 질렌할)의 의지는 정의보단 개인의 욕심을 구체화하고자 하는 광기와 맞닿는다. 실체를 알 수 없는 범인에 대한 의문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만큼이나 매혹적이며 그 매혹에 그들은 차례대로 빠져든다.
범인을 쫓는 인물들은 각각 조디악 킬러에게 다가섰다고 믿지만 그 찰나에 사건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그 과정에서 범인에게 가까이 접근했던 인물들은 각각 차례대로 파국을 맞이한다. 조디악 킬러와 무관하게 삶이 황폐해지고 그 의문과 멀어지는 순간 삶은 무기력하다. 사건의 주변부를 맴돌다 결국 그 중심으로 뛰어드는 그레이스미스만이 –실제로 이 영화의 판권 주인이기도 한-마지막까지 범인을 쫓는다. <조디악>은 광기에 연루 되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범인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처하는 폴 에이브리 기자(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나 꼭 자신이 범인을 쫓아야 당연하다고 믿는 데이빗 토스키 수사관(마크 러팔로)이나 하나같이 그 광기의 주도권을 향해 달린다. 하지만 수사관들은 공적인 체계로 인해 사건의 증거를 공유하지 못하며 이로 인해, 마치 한 면을 맞추면 한 면이 어긋나는 큐브처럼 범인에 대한 확신은 매번 미세하게 빗나간다. 그런 일련의 상황의 번복 속에서 <조디악>에 새겨진 물음표는 ‘그들이 쫓는 자는 누구인가?’에서 ‘그들은 누구를 왜 쫓는가?’로 뒤바뀐다. 결국 <조디악>은 전도된 주객만큼이나 혼란스런 집착의 광시곡으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가장 유력했던 범인이 진범이 아니라고 밝혀지자 토스키 형사는 좌절하며 말한다. ‘제일 엿 같은 건 알렌이 진범임을 확신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빨리 사건을 끝내고 싶었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거다.’ 때론 진실을 아는 것보다 진실을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 절실할 때가 있다. <조디악>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집착인지, 그리고 그런 맹목적인 추격이 얼마나 지난한 싸움인지를 보여준다. 철저하게 한 쪽을 베일에 가린 추격전의 진의는 이토록 알고 싶다는 사적인 욕망이 알아야 한다는 공적인 정의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결국 미치도록 잡고 싶었던 그 심정은 허상을 잡기 위해 발버둥치는 몸부림처럼 허탈하다. <조디악>의 진실게임은 무미건조한 영화의 정서만큼이나 아득하며, 너무나도 매혹적이라 서글픈 이들의 사연인 것이다.
2007년 8월 10일 금요일 | 글: 민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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