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일제강점기의 상해를 배경으로 하는 <색, 계>는 시대와 개인의 경계선 사이에 교묘히 놓인 욕망을 추적한다. 마치 원죄와도 같은 시대적 명분을 짊어지게 된 개인이 금기와도 같은 개인적 욕망에 젖어 드는 찰나의 흔들림을, 동시에 그 아슬아슬한 순간을 매섭게 찌르고 들어오는 욕망을, 그 욕망이 현실을 흔드는 순간 경계선에 놓인 개인은 그렇게 외줄을 탄다. <색, 계>는 욕망(色, Lust)과 신중(戒, Caution)의 선분을 가르는 수직이등분선 같은 교묘한 경계다. 그 경계선은 원색과도 같은 짙은 욕망으로 개인을 유혹하면서 시대라는 투명한 덫으로 접근을 경계한다. 조약돌을 내던지듯 작은 의지에서 출발한 사연은 파문의 동심원처럼 고요하면서도 감당할 수 없게 퍼져나간다.
파문은 애국적 성취감을 맛보고자 하는 젊은 혈기가 선동한 대의적 욕망의 한 점에서 시작된다. 애국심을 고취시키자는 광위민(왕리홍)의 혈기가 세운 연극 무대는 관객의 애국심을 선양시키는데 성공한다. 결국 이에 고무된 단원들은 애국을 볼모로 살의를 숨긴 진짜 연극에 편입된다. 그 순간, 무대의 낭만은 현실로 이양되며 잔인하게 일그러진 예감을 동반한다. 자신의 행동 원리가 시대적 의무인지 자발적 의지인지를 가늠하지 못했던 어설픈 명분은 그들에게 예기치 못한 폭력성의 만끽을 선사하고 그와 함께 조직의 순결했던 명분은 무너지며 대의를 위한 개인의 희생은 능멸의 진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일단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는 길 위에 섰던 개인은 조직과 지도자와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 다시 한번 몸을 판다. 동시에 이는 순결한 사명으로 위장한 개인의 저속한 욕망으로 중첩된다. 공과 사의 중의적 욕망은 개인을 흔들면서 동시에 그 욕망의 수위 조절을 탐닉한다.
이안 감독은 언제나 그렇듯 <색, 계>에서도 사실성을 증명하기 위한 병풍으로 시대를 소비하지 않는다. 이안 감독이 재현하는 시대는 어김없이 인간의 욕망을 담는 그릇이며 <색, 계>는 그 욕망을 직선으로 바라보는 적나라한 품격이다. 금기 속에서 자라나는 개인적 욕망의 시대적 위장 혹은 시대가 그어놓은 경계선을 넘는 개인적 욕망의 발현을 쫓는 <색, 계>의 시선적 욕망이 탐욕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건 그 때문이다. 시대적 풍경을 외형적으로 재현하는 미장센만으로 세울 수 없는 미묘한 심리적 기운, 즉 공간에 떠도는 분위기를 이안 감독은 섬세한 인물의 시선을 통해 공간에 녹여낸다.
인간의 눈은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는 창과 같다. 그건 <색, 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막부인으로 위장한 왕치아즈를 바라보는 이의 눈엔 묘한 탐욕이 서려있다. 동시에 그건 왕치아즈의 곁눈질을 통해서 응답된다. 무언의 시선은 교묘한 육욕의 예감을 만든다. 그 예감은 육체의 탐닉과 욕정의 신음으로 분출되며 이는 동시에 본연의 임무로부터 인물을 도피시킴과 동시에 속박한다. 왕치아즈의 사랑은 막부인으로서 이뤄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위장의 결과물이며 진심으로 귀결될 수 없는 한계의 욕망에 불과하다. 동시에 이의 욕정은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금기의 삶을 해방하는 오르가슴을 만끽하게 하지만 욕망의 배후에 숨겨진 진실의 칼날을 깨닫는 순간, 자신의 선택에 대한 신뢰의 빗장마저 스스로 부수고 가두어야 하는 정서적 파괴의 허탈감이 스며든다. 하지만 <색, 계>는 단지 비극을 바라보며 눈물 흘릴 수 없는 영화다. 욕망을 취한 남녀, 왕치아즈와 이는 각각 생과 사의 귀결점에서 엇갈린다. 하지만 죽은 이보다 살아남은 이의 눈빛이 쓸쓸한 건 더 이상 자신의 욕망-궁극적으로는 사랑이라고 명명되는-을 충족시켜 줄 상대의 빈자리를 기억 속에 각인해야 하는 까닭이다. 결국 살아남은 이는 홀로 시대 안에 갇혀서 개인의 욕망을 가둬야 한다. 더이상 뻗어나갈 곳을 잃어버린 욕망의 가지를 잘라내야 함을 깨닫는다.
<색, 계>는 역사라는 거대한 세계 안에서 쉽게 간과되고 혹은 능욕당한 개인을 들추는 미시적 관점이다. 동시에 인간의 어떤 욕망, 즉 사랑이라는 도발적인 순수성에 대한 탐구적 시선이다. 그 욕망은 탐욕적일지라도 결코 불순하지 않다. 인간은 언제나 욕망한다. 그건 인간의 탐욕이 넘쳐나서가 아니라 인간이 불완전하여 언제나 완성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욕망은 불완전성의 배출임과 동시에 충족이다. <색, 계>는 그 배출과 충족의 경계선 위에 놓인 위태로운 인간을 욕망하는 이안 감독의 출구이자 동시에 입구다. 격조 있는 상 위에 드리운 원색적 욕망은 깊은 감수성의 숨결을 토해낸다. 결국 그 위에 남는 건 얼룩진 욕망의 흔적, 영원히 채워 넣기 힘든 욕망의 빈자리를 감지하는 인간의 쓸쓸함이다. 콘크리트 벽을 뚫고 피어난 들꽃처럼, 시대적 억압 속에서도 개인의 욕망은 덧없이 자라나며 육체를 상실해도 잔인한 추억을 새긴다.
2007년 10월 25일 목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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