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루마니아, 혁명 2년 전. 마치 출생기록을 밝히듯 사연의 지정학적 시공간을 내걸고 시작하는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이하, <4개월>)은 그 무덤덤한 표정을 마지막 순간까지 밀고 나간다. 냉정할 정도로 영화와 적당한 거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대부분 대학 기숙사에 상주하는 여대생 오틸리아(안나마리아 마링카)에게 고정돼있다. <4개월>이 유지하는 그 거리감은 정확히 관객과 영화의 거리이기도 하다. 개입될 수 없는 영화 내부의 삶을 관찰하는 관객은 그 현실에 참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내부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실에 대해서 자신의 감상을 부여할 수 있는 권리를 잊은 채 감상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4개월>은 차우셰스쿠의 독재정권이 무너지기 불과 2년 전, 오틸리아와 그녀의 룸메이트 가비타(로라 바질리우)가 공유하고 있던 모종의 비밀 행각에 대한 이야기다. 시작부터 무언가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오틸리아에 비해 가비타는 계속해서 불안감을 표출한다. 이 시점에서 주어지는 단서는 오틸리아가 가비타를 돕고 있다는 것이며 그녀들이 완수하려는 목적은 다른 삼자에게 꼭 비밀이어야 한다는 것. 낙태가 금지된 독재정권의 체제아래서 임신한 가비타는 불법시술을 감행하려 하고 오틸리아는 그를 돕는다. 그녀들은 지금 타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처지이며 동시에 그녀들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상대는 오로지 서로일 뿐이다.
물론 <4개월>은 여성이라는 동성간의 감동적인 연대기가 아니다. 동시에 윤리적 물음을 던지는 단상도 아니며 어떤 흉포한 시절에 대한 날을 세운 언동도 아니다. 단지 <4개월>의 카메라는 어떤 사연의 건너편에 놓인 창처럼 묵묵하며 스크린은 누군가의 기억을 더듬어가는 개인적 회상의 공간처럼 덩그러니 놓여있다. <4개월>이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거나 어떤 능동적인 결심을 도모하지 않게 만드는 건 이 때문이다. 영화는 어느 시절에 존재했던 시공간의 기운을 영화적 해석이 가미된 감정으로 대변하지 않고 이는 영화의 외부에 놓인 제3자로서의 관객이 (적어도) 영화의 감상 중에 개별적인 감정적 해석을 부여하길 일체 허락하지 않고 있다. <4개월>의 관객은 사건에 대한 온전한 관찰자이자 영화가 비추는 어떤 시대에 대한 완연한 타자에 불과하다. 영화가 철저하게 현실에 거리를 두는 이상, 관객의 시선 역시 그에 준하는 수밖에 없다.
고정된 카메라를 통해 응수되는 건 그것이 바라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카메라가 둔 거리감을 통해 관객이 바라보는 건, 불법낙태시술을 받아야 하는 가비타와 그녀를 돕는 오틸리아의 하루다. 그렇다면 만약 나를 포함한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건 대체 무엇을 위해서일까? 그건 그 현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그 행위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고발의 목적이 아니다. 단순히 증인을 하나 늘려서 그것의 흉악함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근거의 제시를 통해 어떤 잘못을 징벌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4개월>이 제시하는 건 어떤 시절에 당연시됐던 불합리한 세계관 그 자체다. 마치 어떤 관념조차 차단해버린 듯 건조한 영화의 시선에 놓인 건 낙태라는 어떤 행위보다도 그 행위가 벌어지고 있는 과정의 실태 자체다. 낙태라는 행위의 윤리적 판단이 <4개월>에서 온당치 않은 건 그 행위의 주체가 짊어지고 있는 짐이 편중적으로 흐를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현실의 열악함 때문이다. 임신의 책임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건만 폐쇄적인 사회의 제반 조건은 그 결과적인 책임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여성의 육체적 조건을 주홍글씨로 취급하게 만든다. 이는 성 역할의 평등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의 열악함, 혹은 제도적인 불합리가 묵인되는 시대 속에서 파생될 수 밖에 없는 약자로서의 보편적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 불합리의 체계에서 최전선에 서있는 건 가장 쉽게 외면 받기 쉬운 형평성의 가치, 즉 개인의 존엄성이다.
결국 <4개월>이 궁극적으로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 어느 거대한 체제로부터 묵살당한 개인이란 소규모의 존엄성이다. 권력과 제도로 개인이 탄압당하는 시대에서 발생하는 불합리한 체제의 폭력은 결국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시키고 자아를 몰락시키며 스스로의 가치관을 붕괴시킨다. 체제의 강요와 사회적 몰이해 속에서 남성과 여성의 공통적인 책임 의식이 요구되는 임신이란 문제는 낙태를 금지하는 철권통치의 강제하에 육체적 낙인이 선명한 여성만의 고뇌로 점철되고 여성의 육체는 체제의 모순이 만든 제단 위에서 낙태라는 파괴행위에 동참하는 제물이 되며 동시에 불법시술에 스스로 동참한 공범자의 혐의를 덧씌운다. 불합리한 체제 속에서 개인의 인권은 여지없이 짓밟히며 그 수난의 피해자는 자신의 존엄성을 유린하는 폭력적 유기를 스스로의 손으로 행사해야 한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만에 산모로부터 끌려 나온 태아의 얼굴엔 가늠할 수 있는 눈, 코, 입의 형체가 존재한다. 관 하나 집어넣고 애 하나 죽이는 건 쉽지만 실제로 그 주검을 눈앞에 대면하는 건 쉽지 않다. 단순히 개인을 헤아리지 못하고 탄압하는 제도가 횡행하던 어떤 시절은 그 처참한 목격을 가능케 했다. 물론 <4개월>은 이미 그로부터 미래가 된 현대에서 과거의 어느 시제에 머물러 있는 기억일 뿐이다. 하지만 이 단상은 우리가 그로부터 내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유효하다. 우리는 과연 불합리의 시대를 지나 합리적인 시대에 안착했는가. 과연 우리가 오늘날 유기함으로써 먼 미래에 되새김질해야 할 기억들은 얼마나 만들어지고 있을까. 묵묵한 롱테이크만큼이나 묵직한 여운이 머릿속을 길게 맴도는 건 적어도 그런 어떤 의문의 부호들이 여전히 우리 주위 어딘가에 남몰래 수장되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무언의 두려움 때문일까. 그렇다면 언젠가 다시 관찰자의 입장에서 참여할 수 없는 지난 현실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한 상실감이 뒤늦게 밀려온 건 아마도 그래서였나 보다. 무표정한 영화의 시선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 너머에 자리했던 현실의 공허한 흔적들이 깊숙히 밀려들어왔다.
2008년 2월 20일 수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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