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차기로 병을 맞추는 내기를 하던 소년은 여동생에게 대신 공을 넘긴다. 자신 없다는 여동생에게 오빠는 공을 차는 요령을 설명하고 마지막 한마디에 소녀의 눈이 빛난다. ‘넌 할 수 있어(You can do anything).’ 물론 당연히 소녀는 병을 맞춘다. 동기를 부여하는 진실된 충고. <그레이시 스토리>(이하, <그레이시>)가 한계를 극복하는 방식은 바로 그런 진심들의 도움에서 비롯된다.
유망한 고교축구선수였던 쟈니(제시 리 소퍼)는 경쟁팀 킹스톤 고교과의 경기에서 중요한 승부차기를 실축한다. 하지만 동생 그레이시(칼리 슈로더)의 격려로 기운을 차리지만 그 뒤로 그는 경기를 뛸 수 없게 된다. 불의의 차사고로 큰아들을 잃은 집안은 침통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특히 과거 축구선수출신으로 축구를 사랑하기에 큰아들을 아꼈던 아버지 브라이언(더못 멀로니)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고, 그를 지켜보는 어머니(엘리자베스 슈)도 마음이 편치 않다. 그 와중에 그레이시는 오빠를 대신해 자신이 축구를 하겠다고 한다.
<그레이시>는 판에 박힌 성장드라마의 원형 그대로에 불과한 이야기다. 남자들의 스포츠라고 불리는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그것도 남자들과 한 경기장에서 뛰겠다는 소녀의 꿈은 되바라진 믿음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성장드라마의 포맷에 놓이게 되면 결과는 훤하다. 결국 소녀의 꿈은 어떻게든 이뤄질 것이라는 것. 간단히 말하자면 <그레이시>는 뻔한 결과를 향해가는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뻔한 이야기를 하는 방식은 뻔하지 않다. 같은 이야기를 해도 다른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것처럼 <그레이시>는 닳아빠진 상투성의 덫을 피해 전형성이 갖출 수 있는 투지를 드러낸다. 물론 역동적인 그라운드의 움직임을 잡아내는 카메라 워크와 사실적인 축구 장면들은 <그레이시>를 좋은 스포츠영화의 한 맥락으로도 즐길 수 있게 한다. 특히 경기장면만큼이나 사실적이고 체계적인 훈련과정을 배치함으로써 그레이시의 향상된 기량에 설득력을 더하고 그녀의 성장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발생할 거부감의 군살을 뺀다.
성장드라마가 진부해지는 건 그것이 지독히 이상적인 형태의 부추김을 통해 현실감을 외면한 판타지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성장드라마의 득점력은 현실이란 볼을 굴리는 진정성의 드리블로 만들어진다. 드라마와 진정성의 가교역할을 하는 건 대부분 갈등의 국면, 즉 성장통인데 <그레이시>의 성장통은 대부분 소녀를 둘러싼 고정관념들로 발생한다. 운동을 좋아하는 소녀는 레즈비언이라는 친구의 말은 둘째 치더라도 남자와 맞설 수 있는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비아냥은 심상치 않다. 그건 단지 고정관념이 아니라 실제적인 남녀의 신체적 조건에서 기인하는 현실적 한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극복하는 건 아버지의 믿음이다.
'네 한계를 아는 건 좋지만 남의 한계에 얽매이지 마라.’, ‘네가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만두는 건 괜찮은데 계집애처럼 삐쳐서 그만두는 꼴은 볼 수 없다.’ 이런 일련의 대사들이 말하듯이 아버지의 신뢰는 단순히 할 수 있다라는 대책 없는 원조가 아니라 딸의 의지를 존중하는 동시에 그 의지에 한 표를 던지겠다는 진심 어린 지원으로 표명된다. 물론 딸을 위해 아버지가 해줄 수 있는 건 그라운드 밖에서 훈련을 돕는 것뿐이다. 그라운드로 나간 그레이시는 결국 홀로 서서 모든 한계와 싸워야 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혹독한 훈련은 부정의 깊이를 말없이 드러내며 깊은 호감을 부른다.
여자를 축구팀 선발심사에 넣는 것에 대한 심사위원회가 결국 찬성으로 끝난뒤 위원장과 아버지가 나누는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심사결과는 이제 코치에게 달렸어요.’ ‘아니, 이 애한테 달렸죠.’ 저마다의 의미를 지닌 문장들은 고개를 끄덕일만한 아버지와 딸의 대화로 이뤄진다. 그건 뛰어난 문장력 덕분이 아니라 아버지와 딸의 대화가 현실적 한계를 외면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빠와 마찬가지로 그레이시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넌 할 수 있다. 그러니 서두르지 마(wait you’re ready).’ 빠르게 전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주변을 살펴야만 날아오는 태클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을, 아버지는 딸에게 전한다. 아버지로부터 넓은 시야와 강인한 체력, 그리고 결코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끈기를 전수받은 그레이시의 골은 당연할 수 밖에 없다. 골대를 향해 강한 슛을 날리기 위해서 침착한 드리블이 선행되야하듯, 감동을 선사하기 위한 드라마가 먼저 탄탄해야 하는 법이다. <그레이시>는 그렇게 전형성의 기본기로 상투성을 돌파했다.
2008년 3월 14일 금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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