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비린내 나는 2차대전 가운데 가장 많은 피를 흘린 전장은 세인(世人)들이 아는 것처럼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나 연합군의 활약상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서부 전선이 아니라 독일과 구 소련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동부 전선이다. 영화는 히틀러의 마수가 동쪽으로 뻗치기 시작한 1941년의 벨로루시를 배경으로 1200명의 유대인을 구한, 하지만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영웅 투비아의 일대기를 영상으로 그린다.
나치의 손아귀를 피해 피난한 유대인들이 숲으로 모여든다는 설정의, 실화를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 시놉시스는 <로빈 훗>(1991)과 <쉰들러 리스트>(1993)를 떠올리게끔 한다. 영화 속 모델인 실존인물 투비아 비엘스키(다니엘 크레이그)의 일대기는 세상에 잊혀진 듯 하였으나 투비아가 작고한 해인 87년 이후 비엘스키 형제의 일대기 <디파이언스: 비엘스키 유격대>가 소설로 출간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영화에서 이채로운 점 가운데 하나는 그간의 2차대전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유대인 상에서 탈피한 점이다. 연합군과 같은 타자(打者)에 의해 수용소에서 구출되는 식의, 기존의 영화에서 구축되어온 수동적인 유대인 상이 아니라 유대인 스스로가 레지스탕스를 형성하고 공동체를 구축한다는 적극적인 면모를 형성한다. 하나 숲에서 구축된 공동체를 벗어나면 유대인 역시 소련 국민의 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타자라는 이방인 취급을 받게 됨은 러시아 군대에 합류한 투비아의 동생 주스(리브 슈라이버)가 받는 대우를 통해 관찰할 수 있다.
에드워드 즈윅 감독은 롤랜드 에머리히처럼 대규모 스펙터클을 영화 속에서 장기로 내세우지 않는다. 이번에도 그의 장기 중 하나인 인물의 내면 묘사에 많은 부분을 할애함으로 광대한 전쟁 스펙터클을 기대하는 관객에겐 맥이 빠질 수도 있지만 이 영화가 이채로운 이유 두 번째는 투비아가 구축하는 유대인 공동체가 100% 이상적인 유토피아로 묘사되지 않음에 있다. 나치의 손길을 피해 인위적이나마 피난 공동체를 형성케 되지만 그 공동체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 단시간 내에 모인 집단이기에 초반에는 이기적이면서도 자기주장에 적극적인 인간 군상의 면모를 보여준다. 하나 시간이 흐르면서 독일군에 저항하고 생존을 도모한다는 내부의 목표를 가지고 자연스레 혼연일체 된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기둥서방 행세를 하고 약탈품 일부를 챙기는 아카디의 추악함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포로로 잡혀온 독일군을 유대인들이 격살(格殺)하는 시퀀스는 가해자 독일인과 피해자 유대인의 입장에 있어 역전현상이 발생함을 보여준다.
주스는 이상주의자인 형 투비아의 스타일과는 달리 현실을 중시하는 캐릭터로 2인자 컴플렉스를 지니고 형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길 원한다. 러시아군에 합류케 되는 동기도 2인자 컴플렉스에 기인한다. 투비아의 또 다른 동생 아사엘(제이미 벨)의 결혼식과 주스가 독일군을 습격하는 교차편집 시퀀스는 <대부>(1972)에서 마이클 코네오레의 아들이 세례를 받는 동안 정적(政敵)들이 제거되는 교차편집 시퀀스와 오버랩 된다. 숲속에서는 결혼식과 잔치가 이뤄지는 동안 다른 한 쪽에서는 독일군이 죽어간다. 생명과 죽음의 교차다.
아버지를 죽인 나치 부역자에 대한 복수라는 사적 동인이, 죽음을 목전에 둔 유대인들에 대한 측은지심과 박애주의로 발전하고 그들의 생명을 보전한다는 지도자 투비아의 일대기는 역사 속에서 잊혀질 뻔 하다가 21세기에 영상으로 되살아나서 후세들에게 교훈을 제공한다. 그런데 하필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공습하는 작금(昨今)의 현실을 볼 때, 그 옛날 역사의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역사는 이성적으로 발전한다는 사관(史觀)을 가지기 이전에 역사는 순환한다고 보는 순환론적 사관이 보다 현실적으로 와닫는다.
2008년 12월 30일 화요일 | 글_박정환 객원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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