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치 시노부는 늘 ‘배움의 즐거움’을 즐겨 그려왔다. 그의 데뷔작인 <비밀의 화원, 1996>의 주인공인 사키코(니시다 나오미)는 오직 강도들이 잃어버린 거액의 돈 가방을 얻겠다는 불순한 의도로 대학에 가서 지질학을 공부하고 수영과 암벽 등반을 배운다. 사키코는 마침내 목적을 달성하지만, 아주 쉽게 그 돈 가방을 버린다. 사키코는 불순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순수한 배움 속에서 삶의 의미를 재성찰하게 된다. 그의 후속작들이자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똑 닮은 영화들인 <워터보이즈, 2001>와 <스윙 걸즈, 2004>의 경우에도 본질은 마찬가지다. <비밀의 화원>에 비해서 더욱 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집단 성장 영화인 이 영화들에서 일군의 하릴없는 남자 고등학생들과 여자 고등학생들은 자신들과 거의 상관 없다고 여겼던 싱크로나이즈드와 빅 밴드 재즈를 배우면서 삶의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이건 야구치 시노부의 최신작 <해피 플라이트, 2008> 역시 야구치 시노부의 전작들과 같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 격인 스튜어디스 에츠코(아야세 하루카)와 부기장 스즈키(다나베 세이이치)는 이제 직업의 어떤 단계에 접어드려 한다. 하지만 시노부의 전작들의 주인공들이 단순히 ‘아마츄어적인 즐거움’에 빠져드는 것에 비하면, 이들에게 닥친 현실은 가혹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맞닥뜨리는 세계는 프로페셔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제 대중 영화의 감독으로서 야구치 시노부는 어떤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 그가 나이가 드는 것처럼, 그의 영화들의 주인공들 역시 성장한다. 장편 데뷔작 <비밀의 화원>의 사키코는 성인이지만, 판단력이나 행동에 있어 아이들처럼 순진한 인물이다. 그에 비하면 <워터보이즈>와 <스윙 걸즈>의 소년들과 소녀들은 여전히 순수하기는 하지만 세상의 때가 어느 정도 묻어있는 인물들이다. 비로소 <해피 플라이트>를 통해서야 야구치 시노부의 주인공들은 막 성인의 세계에 도달한다. 그의 전작들에 비해 <해피 플라이트>는 비극적이기 까지 하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본인들의 의도와 달리 일종의 실패를 겪는다. 국내선 비행기만 타다가 국제선 업무에 처음 탑승한 초보 승무원 에츠코는 자신을 선망하고 다가온 소녀에게 ‘승무원이 될 생각은 말라’고 경고를 보낼 정도의 좌절을 겪는다. 기장이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에 처한 스즈키 역시 갑작스런 위기에 빠져 회항을 하게 된 비행기의 조종 때문에 곤경에 처한다. 플롯으로만 놓고 보자면 <해피 플라이트>는 일종의 재난 영화에 가깝다. 간신히 비행에 돌입한 하와이행 여객기는 결국 일본으로 돌아와야 하고, 그들의 앞에는 다양한 위기가 다가온다.
성선설의 지지자, 야구치 시노부
그러나 여전히 야구치 시노부는 그의 영화들에서 보여준 인생과 인간에 대한 낙관성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초보들에게는 한없이 가혹한 경험들이지만, 그건 어떤 깨달음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이들 초보들에게는 이들을 지원하고 도와줄 멘토들과 동료들이 존재한다. <워터보이즈>와 <스윙걸즈>에서 익히 보아왔던 것처럼, 시노부의 영화들 속에서 악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엄격해 보이기만 했던 기장과 승무원 팀장은 선의를 지니고 프로페셔널이 지녀야 할 자세를 이들 초보들에게 제시하고 전파해 주는 확실한 멘토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심지어 에츠코에게 역정을 내던 까다로운 손님은 프로페셔널인 팀장의 말과 행동에 감화되어 영화의 종반부에 가서는 에츠코에게마저 사과를 한다. 이건 분명 야구치 시노부의 이전 작들과는 다른 태도다. <워터보이즈>와 <스윙걸즈>의 스승 역할을 한 다케나카 나오토는 영화 속에서 스승의 역할에 초빙되지만, 그만한 외양만 갖추었을 뿐 내용은 갖추지 못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각 부분의 팀장들은 그만한 연륜과 능력을 갖춘 인물들이다. 비행기 속의 기장과 팀장 외에도, 지상 업무를 관활하는 부서장과 엔지니어 팀의 팀장, 관제실의 리더 등은 각기 직원들이 위기에 빠진 순간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존경할만한 인물들로 그려진다. 이들 리더들을 중심으로 각각의 부서들은 톱니바퀴 같은 조화를 이루며 비행기의 이륙 준비에서부터 착륙까지의 과정을 능숙하게 처리해 나가며, 그들간의 연대는 굳이 말을 통하지 않아도 일의 과정을 통해 완성되어 간다.
야구치 시노부 영화들의 등장인물들은 점점 더 많아진다. <비밀의 화원>은 철저히 주인공 캐릭터에 집중한 영화였다. <워터보이즈>는 남학생들의 집단 싱크로나이즈드라는 소재를 통해 일군의 집단 주인공들을 등장시켰다. 이런 구성은 다시 성을 바꿔 빅밴드 재즈 밴드를 하는 소녀들을 다룬 <스윙 걸즈>로 이어졌고, 다시 <해피 플라이트>에서는 여객기 비행과 관련된 거의 전 분야를 그리고 있다. 이 영화에는 비행기의 조종팀과 승무원팀, 공항의 관제팀, 지상 승무원팀, 엔지니어팀 심지어 공항에서 새떼를 쫓아내는 직원까지 공항과 비행기와 관련된 여러 개의 전문가 그룹을 등장시킨다. 이건 야구치 시노부가 점차 개인보다는 사회 조직의 관계망을 좀 더 넓게 통찰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동시에 일본 사회에서 개인과 조직의 의미를 살펴보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성장하는 캐릭터와 감독
아쉬운 점은 <해피 플라이트>가 시노부의 전작들이 담고 있는 특유의 낙관적인 코미디 영화들만큼 빵 빵 터지는 웃음을 주는 영화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 <스윙 걸즈>와 <워터 보이즈>는 구성원간의 갈등이나 수련 과정의 고됨을 은근슬쩍 웃음으로 무마해버리는 경향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포복 졸도할 웃음을 주는 <스윙 걸즈>의 멧돼지 시퀀스나 <워터보이즈>의 수족관 시퀀스들은 가공할만한 웃음으로 성장 영화들 속에 들어갈 첨예한 갈등을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린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해피 플라이트>는 시노부의 전작들과 달리 꽤 갈등의 골이 깊다. 그건 시노부 역시 천연한 10대들의 세계와 전문가로서의 윤리가 확실히 요구되는 세계와의 차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진땀나는 입문 과정을 겪게 된다. 그러다보니 시노부 특유의 망가적인 웃음 코드들은 자취를 많이 감추게 된다. 시노부는 그런 웃음의 요소들을 가발을 쓴 할아버지 등의 다양한 탑승객들의 모습으로 메우려하지만 확실히 웃음의 강도들은 전작보다는 못하다. 하지만 <해피 플라이트>는 극단적 상황을 주고 관객을 공포감으로 밀어넣는 할리우드산 재난 영화들과는 달리 편안하고 행복한 웃음을 주는 영화며, 다른 시노부의 영화들처럼 ‘성장’의 과정에 무한한 애정을 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영화의 캐릭터들처럼 감독 스스로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의 웃음소리는 조금 더 나직해졌지만, 그의 통찰은 점점 현실에 접근해 오고 있으며 <해피 플라이트>는 그것을 증명하는 영화다.
about DVD
최근작인 만큼 DVD의 영상과 음질은 말끔한 편이다. 통상적으로 차분한 느낌의 성향을 지니는 일본 영화이지만, 상대적으로 이 영화의 DVD 색감은 깔끔하고 화사한 편이다. 돌비디지털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 역시 예상 외로 서라운드 활용도가 높다. 특히 후반부 착륙 장면에서의 음향 효과가 좋은 편이다. 아쉬운 점은 서플먼트로, 이전에 국내 발매된 야구치 시노부의 전작들이 본편을 능가하는 상당량의 부가 영상을 수록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아무런 서플먼트도 담고 있지 않다.
해피 플라이트
출시일 : 2009-09-24
출시사 : 아트서비스
Starring : 아야세 하루카(에츠코) / 타나베 세이이치(스즈키) / 토키토 사부로 / 후키이시 카즈에 / 테라지마 시노부 / 기시베 잇토쿠
Director : 야구치 시노부
Running Time : 104 Min
Video Format : 1.85:1 아나몰픽 와이드스크린
Audio Track : 일본어 / 돌비디지털 5.1, 돌비디지털 2.0
지역코드 : 3
관람등급 : 전체 이용가
디스크수 : 1disc
자막 : 한국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