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병(정윤민)의 손끝에서 시작되는 신기한 마술에 흠뻑 빠지는 미아(황우슬혜). 이내 그들은 불타는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상병은 게이인 동시에 에이즈 환자다. 상병을 사랑한 죄일까? 질투의 화신으로 변한 미아는 방아쇠를 당겨 그의 애인을 죽인다. 게이임에도 여자를 사랑한 대가로 상병은 혼자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교도소로 향하고, 미아는 에이즈에 감염된다. 한편, 아내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쓴 수인(김남길)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탈옥을 시도하는 무기징역수다. 어떻게 해서든 감옥에서 나가기 위해 상병을 이용, 에이즈에 감염되어 탈옥에 성공한다. 그는 아내를 죽인 범인을 잡아 복수하려 하지만 의도하지 않은 사고로 실패한다. 한순간 삶의 목표를 잃은 수인은 상병이 알려준 ‘카페 루트’로 향하고, 그곳에서 홀로 일하고 있는 미아를 만난다.
<폭풍전야>는 과연 그들이 폭풍 같은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사랑을 믿지 않는 두 주인공을 등장시킨다. 미아는 한 순간의 사랑이 빚어낸 비극을 홀로 감당해내야 하는 인물이다. 질투로 얼룩진 살인, 그리고 에이즈라는 병은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죄로 남겨진다. 이로 인해 미아는 남을 사랑하거나 사랑 받기를 거부하는 운명에 처한다. 수인도 마찬가지다. 그는 바람을 피운 아내를 죽였다는 누명으로 수감된다. 누명을 벗고, 아내를 죽인 살인범을 자신의 방법대로 처벌하기 위해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상병의 피를 자신의 혈관에 주입한다. 오로지 복수를 꿈꾸는 그에게 사랑의 감정은 갈라진 땅처럼 메마른지 오래다.
영화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의 감정이 피어 오르는 과정을 느리게 담아낸다. 조창호 감독은 두 인물이 함께 생활하는 ‘카페 루트’라는 공간을 주된 배경으로 사용해 연극적인 분위기로 이야기를 구성한다. 인적이 드물고 바다와 가까운 이곳은 둘만의 공간인 동시에 서로 감추고 있는 비밀을 밝히며 죄를 고백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상병의 부탁으로 이곳에 온 수인과 그로 인해 자신의 죄를 다시 떠올리며 고통스러워 하는 미아. 그들은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것처럼 카페에서 서로의 비밀을 고백하며 연민의 정을 느낀다. 또한 직접화법이 아닌 은유적인 대사는 사랑의 감정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 영화의 느낌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영화의 중요한 요소로 쓰이는 마술은 다소 심심할 수 있는 이야기를 환상적으로 변화시킨다. 극중 마술사인 상병은 하늘에 던진 공을 사라지게 하거나 자신의 몸을 사라지게 만드는 마술을 부린다. 영화는 자신을 감추고 남을 속일 수 있다는 마술의 요소를 차용해 두 주인공의 심리를 잘 드러낸다. 미아는 아무것도 없는 손에서 꽃가루가 나오는 마술을, 수인은 자신의 눈을 가리며 사라지는 마술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자신의 절망적인 삶을 감추려 한다. 특히 누군가에게 마술을 보여주기 위해 매번 색종이를 오리는 미아의 모습은 희망이 없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까지 느끼게 한다.
극중 김남길과 황우슬혜의 연기는 영화를 이끄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들은 에이즈라는 불치병과 사랑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기에 쉽게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두 사람 모두 각자의 감정을 내지르지 않고 억누르는 연기를 자기식으로 풀어낸다. 김남길은 중저음의 목소리와 무표정한 얼굴로 감정을 절제하고, 황우슬혜는 쉽게 표현하기 어려운 어두운 내면을 밝은 미소 속에 잘 감춰둔다. 특히 수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분에 찬 고함을 내지르는 장면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처럼 <폭풍전야>는 그들의 억누른 감정 연기에 힘입어 마지막, 서로를 향해 사랑의 감정을 표출하는 장면을 극대화 시킨다.
하지만 <폭풍전야>는 수인과 미아의 사랑이 마침내 이뤄지는 순간까지 기다리기 쉬운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에이즈와 동성애라는 작위적일 수 있는 소재, 한정된 공간과 한 번 들으면 계속해서 그 의미를 되짚어봐야 하는 대사, 그리고 사랑의 감정을 억누르며 보여주지 않기 위해 꽁꽁 싸매는 인물들로 인해 대중들에게 친절한 작품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 영화가 매력적인 것은 그들의 무미 건조한 관계가 사랑으로 변하는 과정을 뚝심 있게 밀고 나가는 것에 있다. 그들의 사랑은 한 순간에 만나 첫 눈에 반하고 이내 이별하는 패스트푸드식 사랑과는 다른, 오랜 숙성을 통해 만들어지는 묵은지스러운 사랑이다. 그러므로 연민의 정이 쌓여 격정적인 사랑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의 여파는 꽤나 강하다. 특히 눈물의 베드신은 지금껏 억눌렀던 사랑의 감정을 표출하는 동시에 그 사랑을 이어나갈 수 없는 현실의 중압감을 동시에 보여준다. 연민의 정에서 사랑의 감정으로 변하는 이들의 모습을 차분하게 지켜본다면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2010년 3월 29일 월요일 | 글_김한규 기자(무비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