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박복한 팔자다. 수년 동안 남편에게 구타를 당해왔다. 짐승 같은 시동생에게는 성적 착취의 대상이 됐다. 가부장제에 젖은 마을 어른들에게 온갖 괄시를 받았다. 6가구 9명만이 거주하는 작은 섬 무도에 사는 복남(서영희)이의 팔자다. 그런 비이상적인 섬에서 복남을 버티게 하는 유일한 힘은 딸이다. 마침 어릴 적 친구였던 혜원(지성원)이 휴가를 맞아 무도를 찾아온다. 복남은 그녀가 자신과 딸을 이 섬에서 데리고 나가 줄 것이라 희망을 품지만, 혜원은 복남의 현실을 모른 체 한다. 결국 복남은 딸을 지키기 위해 도주를 결심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딸이 목숨을 잃는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했다. 복남이 드디어 ‘복수의 낫’을 들었다.
이 영화의 첫 번째 관건은, 본격적인 복수가 시작되기 전까지 ‘관객이 얼마나 잘 버텨 줄 것인가’에 있다. 영화는 복남의 기구한 팔자를 그려내는데 무려 절반가량의 시간을 쓴다. 그 시간 동안 관객이 목도하게 되는 복남의 삶이란, 인간보다 짐승의 그것에 가깝다. 남성들의 성 노리개로 이용당하고, 마을 어른들에게 노예처럼 부림을 당하는 이 여자, 복남의 삶을 묵묵히 지켜보기란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다. 답답하고 불편하다. 서럽기까지 하다. 여성 관객들이 불쾌해 할 성적 묘사도 종종 등장한다. 남성 관객이라고 해서 그리 유쾌할 장면들은 아니다. 이렇게 영화는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주인공을 극도의 절망 속으로 밀어 넣는다.(김기덕 감독의 분위기가 감지된다면, 제대로 본 거다. 연출을 맡은 장철수 감독은 김기덕의 조감독 출신이다.)
하지만 (기다린 자에게 복이 있나니) 복남의 서러운 감정을 차곡차곡 쌓으며 관객의 심적 온도에 불을 지피던 영화는, 최고조에 다다라 눌렀던 인내심을 한꺼번에 투하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는 ‘이보다 통쾌 할 수 없는’ 반전이다.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른다’며 괄시받던 복남이 그 낫을 무기 삼아 복수에 나서면서 영화는 리듬을 탄다. 목이 서걱서걱 잘리고, 피가 사방팔방으로 튀는 등 하드 고어와 스플래터, 슬래셔 무비의 어법을 이리저리 뒤섞인다. 수위가 너무 높은 게 아니냐고? 높긴 하다. 하지만 거북함보다, 짜릿한 쾌감과 카타르시스가 더 크게 인다. 마치 과거 복남이 겪었던 한을 달래주는 씻김굿 같은 느낌이다. 중간 중간 들어선 블랙유머가 영화의 잔인함을 중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토록 많은 장르를 잡탕으로 섞고 있으면서도, 그 어떤 스릴러보다 뚜렷한 장르적 색깔을 내뿜고 있는 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혁신’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에는 호들갑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단어를 붙여주고 싶은 작품이다.
앞서 나온 비슷한 류의 잔혹 스릴러 <아저씨> <악마를 보았다>와 비교하며 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는 관람기가 될 듯하다. 사회와 국가가 제구실을 못하자 ‘아저씨’가 옆집 꼬마를 구하겠다고 직접 나섰다.(<아저씨>) ‘피해자의 남자친구’도 복수의 칼을 직접 갈았다.(<악마를 보았다>) 공권력이 해결 못하는 암울한 현실을 혼자의 힘으로 처단한다는 것에서 복남이 역시 앞선 두 남자와 비슷하다. 하지만 그녀는 국가의 구멍 난 시스템 뿐 아니라, 불합리한 상황을 보고도 못 본 체 하는 방관자들, 즉 타인에 무관심한 우리 현대인에게도 낫질을 가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우리에게 보다 보편적인 의문을 던진다. 당신도 방관자인가? 이 물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2010년 8월 30일 월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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