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령당했던 시대의 설움을 구구절절 교육받아온 탓일까. 잊을 만하면 불뚝불뚝 솟아오르는 그네들의 망언 때문일까. 어쩌면 전쟁의 상흔을 기민하게 딛고 저만치 부상해버린 그들을 올려보는 자격지심 때문인 걸까. 일본의 '역사에 대한 개입'을 접할 때마다 그들과 눈길 한번 나누어 보지 못한 나조차 유독 신경이 곧추서곤 한다. 단지 '감동과 눈물' 카피에 홀려 각박한 마음을 잠시나마 포근히 적셔보려고 찾아간 [호타루]는, 그런 이유에서 도리어 내 마음의 결을 거스르는 영화였다.
보드라운 화면과, 담담한 전개로 무장한 이 영화는 일본의 국민배우라는 [철도원] 아저씨 다카쿠라 켄의 편안한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워 '휴먼 드라마'임을 강조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잔잔한 자연 풍광과 소박한 사람들의 도타운 손길은 분명, 살갑기 그지없다. 그리고 영화는 그 배경처럼 따뜻한 눈으로 (일본의 영원한 치부로 남을) 제2차 세계대전까지 더듬어 보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성급했거나, 너무 교활했다. 거창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소외되어 왔던 개인의 사사로운 역사를 들추는가 싶더니, 그 사적인 감성으로 한국인에게 화해를 청한다. 하지만 그 다사로운 몸짓을 덥썩 받아들이기엔 갸웃갸웃 영 석연치 않은 것은 비단 내가 가진 일본에 대한 비뚤어진 시각 때문만은 아니리라.
[호타루]에 등장하는 일본인들은 참 착하다. 천황이 서거했다는 소식에 자살을 감행하는 옛 가미카제 특공대원은 그저 순진하기 때문에 역사의 흐름에 휩쓸린, 가련한 희생양처럼 보인다. 출격하는 군인들을 다독이는 할머니는 거룩한 성녀의 역할을 떠맡는다. 다카쿠라 켄이 연기한 야마오카 또한 식민지 한국에서 온 김선재에 대한 일말의 거리낌없이 그를 존경하고 마음에 품는다. 전쟁 당시 일본인이라고 모두 뒤틀려 있었던 것은 아닐 테니, 그런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에 불만은 없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단지 그들의 선함만이 부각되면서 일본이 반성해야할 부도덕한 역사는 은근슬쩍 자취를 감춘다. '평범한' 일본인의 인간적인 고뇌만를 조망하고 껄끄러운 책임은 영화의 밖에 밀려나 있는 '비범한' 일본인에게 전가시켜버리는 형국이다.
야마오카가 그의 생명의 은인인 김선재의 약혼녀와 결혼하여 소소하게 꾸려나가는 삶의 여정에서, 일본인은 그들의 빚을 제법 겸허하게 감당해 왔더라는 흐뭇한 표정이 엿보인다. 따라서 그가 김선재의 고향 안동을 찾아 사죄하는 설정은 역사의 엉킨 매듭을 풀려는 시도보다는 친절한 감상에서 우러난 자기만족의 행위로 느껴진다. [호타루]의 250만 일본관객들이 흘렸다는 눈물 또한 아마도 짙은 회한과 참회의 눈물이 아닌, 얄팍한 자기 정화의 그것이 아니었을런지. 감독은 자국민을 위안하기 위해 '한국'을 차용했던 것일까.
스크린을 등지니 이건 아닌데 씁쓰레한 아쉬움이 혀를 감돌았다. 아직 예민한 앙금이 밟히는 한일관계를 조금이나마 매끄럽게 다듬기 위해서는, 더욱 신중해야 할텐데.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인류애로 포장한 거짓 사죄가 아닌 진정한 '반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