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안병기 감독이라는 이름에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 좀 씁쓸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이제 세계로 도약하는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될 정도로 어느 정도 수준을 갖췄을 거라고 믿었는데, 그건 나만의 바람이었나 보다. 두시간여 동안 가장 무서웠던 사실은 어둠이 짙게 깔린 극장 안에서 딱히 공포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원조 교제 특종기사로 협박을 당하던 지원(하지원)은 핸드폰을 바꾸고 친구가 빌려준 집에서 은둔 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바뀐 전화로 끊임 없이 괴전화가 걸려오고, 친구 호정(김유미)의 딸 영주가 전화를 받고 난 뒤로 이상한 행동들을 하기 시작한다. 한편, 원조 교제 특종으로 사회적인 매장을 당한 괴한은 지원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그녀에게 위협을 가하고, 그 와중에도 발신표시 불가인 전화가 지원의 핸드폰으로 계속 걸려오고…
예전에 필자가 <스터 오브 에코>라는 영화를 보면서 손톱이 부러지는 장면을 보고 극히 짧은 순간에 공포를 극대화하는 감독의 연출력에 놀란 적이 있었는데, <폰>의 첫 장면에서 그와 흡사한 장면이 연거푸 어설픈 모양새로 등장한다. 또한 <가위>로 인연을 맺은 최정윤의 특별출연으로 연출된 그 장면은 일단 '최정윤'의 등장 자체가 그간 <스크림>이나 여타 할리우드 호러 영화에서 즐겨 사용했던 유명인의 까메오 출연을 연상시킨다. 얼마전 부천에서 <검은 물 밑에서>를 본 필자는 <폰>에서 혐오감을 주었던 수도꼭지에서 머리카락이 나오는 장면이 그 영화에 그대로 담겨져 있음을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울에 비추인 귀신의 모습이라든지, 아이를 통해 영(靈)의 존재를 부각시킨다든지 하는 이야기는 나까다 히데오 감독이 이미 몇 번씩이나 써먹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게 되자 도대체 감독이 주장했던 디테일한 드라마는 어디서 가져온 것인가 하는 회의가 들 정도였다.
<가위>에 이어 한국적인 공포와 일상의 공포를 이야기 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는 어디선가 베껴온 듯한 영화적 구성으로 인해 필자를 실망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영화 속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현실에서 동떨어진 느낌을 주는 까닭으로 영화에 대한 집중은 물론 몰입 자체를 방해하는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사실은 "왜?"라는 물음표들만 머리 속을 어지럽히고 만다.(도대체 데스크에게 그렇게 큰 소리 칠 수 있는 돈 많은 기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물론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소리가 주는 공포를 십분 살려낸 점과 한국영화 최초로 미국 직배사인 브에나 비스타의 투자를 받았다는 점은 높이 살만 하지만, 과연 그만큼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을 만큼의 큰 그릇이었나를 돌이켜 보면 여전히 부족하고 아쉽다는 생각만이 들 뿐이다.
원조교제, 인공수정 등 사회적인 다방면의 문제를 한번쯤 다 들춰 내고 싶어했던(?) 감독의 의도는 혼돈과 어설픔으로 마무리 되며, 어느 하나 문제에 대한 명쾌한 이해도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삼 세판이라고 했으니 다음 작품에선 보다 안정적인 모습을 갖춰 줄 수 있을까? 토일렛 픽쳐스라는 이름으로 첫 발걸음을 시작한 안병기 감독님께 전하는 이 같은 아쉬운 소리는 그만큼 그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사실을 알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