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들어 할리우드는 새로운 뮤즈로 '악녀'를 선택했다. 더 이상 청순한 미모와 순종적인 성격을 뽐내며 남성들이 쌓아올린 여성신화에 부응하는 여성상은 환영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뿌리깊게 남아있는 '공주만들기'에 대한 집착은 블론드 미인들을 위한 한심하기 그지없는 팝콘무비 등을 통해 변칙적으로 부활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도 대담하고 강인하게 자신을 보호하며, 여성만의 고유한 매력을 이용해 착취의 기쁨을 누리는 악녀들의 등장은 할리우드 영화 지형도를 더욱 풍부하게 넓히며 은밀하고 통쾌한 쾌감을 선사한다. 캐서린 터너, 글렌 클로즈, 샤론 스톤, 킴 베이싱어, 미셸 파이퍼, 레베카 드모네이 등 80년대와 90년대의 할리우드 영화들을 치명적인 매혹으로 장식했던 배우들에 이어 90년대 중반부터 니콜 키드만, 제니퍼 틸리, 사라 미셸 겔러, 리즈 위더스푼, 미나 수바리 등이 독특한 매력으로 승부하며 각기 다른 영역의 영화에서 팜므 파탈(숙명적인 여성 캐릭터, 흔히 악녀라 지칭)의 계보를 잇고 있다. 더 이상 남성의 파멸을 꿈꾸며 맹목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극단적인 상황에 매달리지 않고, 더욱 복합적으로 성취를 향해 전력투구하는 세련된 여성상을 대변하며 스크린을 장악하는 이들의 모습은 여성 관객들에게 대리만족의 기쁨을 선사하며 틀에 갖힌 여성성 묘사에 대한 해방구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성취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끝에 아찔한 최후를 맞이하는 팜므 파탈이 점차 사라지고, 세련된 미모와 지적 능력, 게다가 야누스처럼 적절하게 동물적인 변신을 선보이는 매력적인 팜므 파탈이 새로운 유행으로 추앙받으며 최근의 '악녀' 영화들은 더욱 독특하고 깊이있는 접근을 통해 팜므 파탈을 묘사한다.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은 팜므 파탈은 살아남기 힘든 것처럼 보일 정도다. 이제 팜므 파탈은 극단적으로 악을 추구하는 단세포적 캐릭터에서 벗어나 은밀하고 위험하게 성공을 쫓으면서 온갖 매력을 아찔하게 드러내는 이상화된 '여신'으로 등장하여 '완벽한 아름다움'을 내뿜어야 한다. 이러한 경향이 낳은 팜므 파탈의 이미지는 다양하게 변주하는 캐릭터를 선보이며 '새로운 시각으로 영화 읽기'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한편 이런 파격성과는 달리 전형성을 통한 파격을 선보이는 영화들도 줄곧 발표된다. 롤랑 조페 감독의 [굿바이 러버]는 전형적인 악녀를 통해 거듭되는 반전이 노출되는 영화의 중심에 서 있다.
[굿바이 러버]의 스토리는 팜므 파탈이 등장하는 전형적인 스릴러와 별반 다르지 않다. 특히 사건이 진행될수록 점점 복잡하게 얽히는 인물들 간의 유대와 배신이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돈'이라는 설정은 여타의 영화들에서 무수히 반복되어 왔던 것이기에 자칫 진부함을 안길 수 있다. 롤랑 조페는 이러한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자극적인 어법을 구사한다. 스릴러의 틀을 빌려 종교적 접근과 의도적 희화화 등을 시도하며 장르의 잡종교배를 시도한다. 교회에서 벌어지는 아찔한 정사와 끊임없이 산드라의 의식상태와 교차편집되며 등장하는 성가대의 합창 장면 등은 절대적인 가치를 공격하고, 전복하려는 당찬 의도가 정신 결함을 앓고 있는 한 여성의 심리와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색다른 쾌감을 만들어낸다.
거듭되는 반전이 팽팽한 긴장을 조성하는 가운데, 영화 전편에 깔린 냉소적 시선은 끈적거리는 위험수위의 스릴러에 의도적인 가벼움을 불어넣으며, 색다른 도발을 만끽할 수 있도록 이끈다. 보다 그럴듯하게 위험한 추리를 이어나갈 수 있는 이야기에 활기를 덧칠하는 것은 처절한 냉소와 유머까지 느껴지는 장면들이다. 정색하고 전형적 공식을 따르며 반전을 이어나가는 대신 엉뚱한 유머와 도발을 꾀하는 장면들이 신선한 감각을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 [굿바이 러버]를 특별하게 만드는 일등공신은 바로 산드라 역을 연기한 패트리샤 아퀘트일 것이다. 성적 매력과 도발을 무기로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처절한 욕구의 소유자 산드라는 마치 바비인형처럼 과다하게 성적매력을 표출해 도리어 메마르고 건조한 느낌을 남긴다. 과장된 표정과 말투로 일관하고, 매 순간을 '연기'하며 살아가는 산드라는 이미 [로스트 하이웨이]를 통해 팜므 파탈의 전위적 전복을 선보였던 패트리샤 아퀘트에 의해 '메리 포핀스'의 정원에 갇힌 줄리 앤드류스로 생생하게 살아났다. 다소 [스티그마타]나 [로스트 하이웨이]의 이미지를 복제하는 듯한 인상을 남기긴 하지만, 여전히 불쾌하기 이를데 없는 악녀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각인시키는 패트리샤 아퀘트의 도발은 또 한번 성공적인 결과로 비춰진다.
패트리샤 아퀘트와 더불어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형사 역의 엘렌 드제네러스 또한 레즈비언의 이미지를 캐릭터에 연결시켜 미묘한 매력을 상승시킨다. 지나치게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는 동료 경찰을 깡그리 무시하는 남성적 캐릭터의 여형사는 엘렌 드제네러스의 중성적인 이미지와 어울리며 냉소의 기운과 유머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돈 존슨이나 더못 멀러니, 메리 루이스 파커 등도 기존의 출연작과는 다른 역할을 무난하게 연기하지만, 두 여성들의 카리스마에 밀려 크게 돋보이지 않는다.
젊은 감독의 패기와 영화 뒤틀기에 대한 재주를 느낄 법한 [굿바이 러버]의 감독이 롤랑 조페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주홍글씨]같은 실패작을 제외하면, [미션]과 [킬링필드] 등을 통해 휴머니즘의 정수를 선보였던 그이기에, [굿바이 러버]는 그의 기존 작품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분명 당혹스러운 선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재기를 심어놓는 재주만큼은 그의 재능이 녹슬지 않았음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물신주의에 대한 조롱과 치기 사이를 오가며 다소 삐걱거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매끄럽게 영화를 만드는 재주 만큼은 뛰어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