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큐브>의 등장은 신선했다. 캐나다의 신인 감독 빈센조 나탈리는 가로 세로 높이 4.2미터의 정육면체 방에 사람들을 가둬 놓고 그들의 심리를 관찰했다. <큐브>의 공간은 폐쇄 공포는 최대화하면서 예산은 최소화한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 물론 그건 그 안에서 얽히던 인물들의 마음이 섬세하고 밀도 높게 표현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매혹적인 정육면체 공간이 다시 돌아왔다, 하이퍼(hyper)라는 부제까지 달고. 큐브는 더 창백해졌고, 더 영리해졌다. 벽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빛은 실험실, 혹은 정신 병동을 떠올리게 하며 인간을 압박한다. 게다가 쉬고 있던 동안 얼마나 더 많은, 그리고 섬뜩한 기술들을 '섭취'했는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술수들을 배부르게 품고 있다. 자기가 무슨 포켓몬이라도 되는 줄 착각한 듯 큐브는 한 단계 진화하여 이젠 마치 생물처럼 스스로 꿈틀거린다.
기본 설정은 전편과 같다. 어느 순간 눈을 떠보니 큐브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 서로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그들이지만 살아남겠다는, 덜 외롭겠다는 이기적이고도 어리석은 욕망으로 팀을 이루어 출구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큐브는 통과해도 통과해도 끝이 없고.
물론 후편의 방식에 더 흥미를 느끼는 관객도 있을 테지만, 전편의 방식이 더 자극적이다. 논리와 이성으로 길들여진 인간의 두뇌는 비논리적임에도 동감할 수 있는 이야기 전개에 더 깊은 동요를 느낀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실재하는 감정의 모순에 스스로 당황하기 때문이다. 감성에 바탕하여 이성에 도전하는, 이런 낯선 접근과 낯선 풀이는 그 어떤 명료한 존재보다 더 공포스럽고 떨치기 어렵다. <큐브>는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 그 출렁이는 여운을 오래 남기는, 가장 사악하고 치밀한 작전을 구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큐브 2: 하이퍼 큐브>는 전편의 성공을 오해했거나 너무 부담스러워 했다. 두 번째 큐브는 공포의 시각화에 주력한다. 온갖 컴퓨터 기술을 동원하여 차갑고 사나운 이미지들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일으키는 공포는 순간적이며 표피적이어서 보는 이의 마음까지 침투하지 못한다. 인물들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좀더 '보여'주려는 시도인 듯 빙빙 도는 카메라는 때때로 지나치다. 후편의 이런 특징은 아무래도 감독을 맡은 안드레이 세큘라가 촬영 감독 출신이라는 점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듯하다. 그는 시각이 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전편이 지닌 위상 때문에 <큐브 2>는 영화 자체가 지닌 한계보다 더 손해를 본다. 전편과 비교하지만 않는다면 이 영화에서도 몇 가지 미덕을 찾아낼 수 있다. '평행 우주 이론'을 도입, 시공간을 파괴하여 존재의 확실성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나 비극적인 결말을 통해 집단을 이룬 인간들의 맹목적인 광기를 폭로하려는 시도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지닌 이런 미덕은 그다지 부각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흐지부지 흩어져 버려 어딘가 아쉬움을 남긴다. 우리는 많은 것을 기대하기보다는 <큐브 2>가 권하는, 명쾌하게 풀리기에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가벼운 머리 운동이나 편안히 즐기며 시간을 때우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