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선을 자극하기 이전에 온 몸의 세포 하나 하나를 흔들어 깨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뮤지컬 고유의 능력이자 사명일 테다. 그렇다면 <시카고>는 한 걸출한 뮤지컬을 스크린 안으로 불러오기 위한 모범답안에 매우 가까이 닿아있는 영화. (말 그대로 <물랑루즈>의 야심이 ‘스크린용 뮤지컬’을 제작하는 것이라면, <시카고>는 “어떻게 하면 뮤지컬을 스크린에 효과적으로 옮겨놓을 수 있느냐”를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얄밉도록 능란하게 풀어내 놓는 것이 내러티브 보다는 춤과 노래의 향연이라는 점만 보더라도 ‘뮤지컬 영화’ <시카고>의 방점이 영화보다는 뮤지컬에 찍혀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기는 어렵지 않다. 의도하는 것은 엔터테인먼트의 절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얘기.
이미 작품성과 대중성을 분리해 생각하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는 오늘날의 관객들에게 ‘엔터테인먼트의 절정’이라는 말은 최상급의 찬사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시카고>에게 작품상을 비롯해 총 6개 부문의 트로피를 안긴 오스카의 선택을 굳이 언급할 필요까지도 없는 일. 그리하여 <시카고>는 명실공히 세계적인 화제작이 되었다.
1929년 대공황 전까지 1920년대는 명실공히 미국의 최전성기였다. 저 악명 높은 알 카포네를 비롯한 갱들이 벌이는 핏빛 범죄와 밤마다 벌어지는 화려한 쇼가 공존한 시대. 총소리, 재즈가 밤하늘을 수놓던 그 시절은 미국인들에게 그 위험함만큼이나 매혹적인 동경의 대상으로도 남아있는 모양이다. 역사적인 배경을 간략하나마 언급하고 넘어간다면, <시카고>는 <작고 용감한 아가씨>라는 제목의 연극으로 1926년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연극이 보여준 날카로운 세태 풍자에 답하는 관객들의 환호에 힘입어 1927년과 1942년에는 각각 무성영화 <시카고>와 진저 로저스 주연의 <록시 하트>로 스크린에 옮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롭 마셜의 <시카고>는 앞서 열거한 작품들보다는 1975년 처음 제작된 뮤지컬 버전에 깊이 토대하고 있다. 당대의 드림팀인 작곡가 존 칸더와 작사가 프레드 엡이 콤비를 이뤄 만들어낸 이 작품은 귓가에 척척 달라붙는 매력적인 음악에 밥 포시의 안무가 도발적인 생명력을 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앞서 언급한대로 영화가 무엇보다 우선적인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이 걸출한 뮤지컬 <시카고>를 최대한 훼손 없이 스크린으로 가져오는 일이다. 이것은 이를테면 TV의 공연정보 프로그램들처럼 카메라 안에 공연 장면을 그저 담는 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대와 스크린은 공간상 분명 커다란 차이가 있기 때문. 그렇다면 영화 <시카고>만의 특색은 바로 그 차이에서부터 출발한다. 예컨대 이런 부분. <시카고>는 화려한 세트보다는 관객을 직시하며 노래하고 춤추는 배우의 힘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뮤지컬이다. 그렇다면 이 ‘약속’에 합의해 줄 관객이 더 이상 없는 지금, 새로운 <시카고>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이와 같은 물음에 맞서 영화는 전체적인 구조를 현실과 상상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전개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관객은 경찰에게 조사를 받고 있는 록시를 지켜보지만, 다음 순간에는 무대 위에서 자신을 위해 변호해주는 남편을 향해 애교 섞인 감사를 날리는 그녀의 머리 속을 함께 들여다보게 되는 것. 뮤지컬에서 벨마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이야기를 록시 위주로 다시 추려낸 것도 영화가 택한 영리한 행보의 하나다.
캐서린 제타 존스와 르네 젤위거, 리차드 기어와 존 C. 라일리는 뮤지컬 전문배우들의 노련함과는 또 다른 신선함으로 승부하며 춤과 노래, 연기의 삼박자를 소화해냄으로써 캐스팅 당시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감옥의 여죄수들이 입을 모아 노래하는 관능적인 "Cell Block Tango"와, 영화의 말미를 장식하는 젤위거와 제타 존스의 "I Move On"은 관객의 세포를 흔들어 깨운다. 또 “이 세상도, 법정도 모두가 쇼무대”라며 리차드 기어와 르네 젤위거가 보여주는 유머러스한 꼭두각시 연기는 특히 감탄을 자아내는 장면. 그러나 ‘엔터테인먼트의 절정’을 제공하기 위해 풍자의 칼날을 상당부분 감췄다는 점은 단점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지적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막이 오르자마자 캐서린 제타 존스는 관객이 문득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도발적으로 "All That Jazz"를 열창한다. “.....난 누구의 아내도 아니지. 내 인생을 사랑해(No, I'm no one's wife. But, Oh, I love my life. And all that Jazz!)” 자못 비장한 마지막 가사를 내뱉으며, 벨마는 그렇게 재즈를 정의한다. ‘진은 차갑지만 피아노는 뜨거운’ 곳. 대중은 변덕스럽지만 그래서 더욱 매혹적이고, 그녀들이 가진 것은 재즈 선율에 몸을 싣는 스스로의 몸뿐이다. 그렇다면 서로 으르렁대던 벨마와 록시가 다시 무대 위에서 만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무대 위에 있을 때만 비로소 살아있게 되는 그녀들이므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언론과 쇼비즈니스의 속물주의를 냉소하면서도 심장의 박동수를 높이고 세포를 깨우는 재즈의 시대를 찬미하는 <시카고>가 2003년의 관중들을 사로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