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본 필자, 현재 호화찬란한 겉모습으로 도배질되어있는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하는 극장식 스텐드빠, 요즘말로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시계부랄처럼 정처 없이 들락날락거리다가 호랑이 끽연하던 시절의 극장이 뜬금없이 반추되기에 이렇게 키보드를 두들기게 됐다. 물론, 영화보다 영화관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는 듯한 우울한 복받침을 지워낼 수 없는 개탄스런 현 상황을 꼬집어주기 위한 객기스런 의도 역시 포함돼 있다.
기억들 나실 게다. 전(두환)노인이 한창 의기양양할 때 온 백성의 여흥을 돋우고자 3S(Sex Screen Sports)정책을 폈던 시대를. 이러한 전 정권의 기고만장한 술책에 의해, 기실 80년대의 영화판은 에로물의 중흥기였다. 하여, 당시 우리네 중고딩들은 민중의 실천적인 시대정신이 충만하던 쌍팔년도의 대승적 분위기와는 아무 상관없이, 일단 무작정 솟아오르며 분기탱천하는 육욕을 해소하고 원초적인 젊음을 불사르고자, 수많은 제도적 바리케이드와 엄마누나아빠 등등의 정실어린 시선의 윤리적 장애물을 별 무리 없이 사뿐히 눌러대며, 동네 한 구석에 을씨년스럽게 자리한 상영관을 넘나들었다. 그 곳이 다름 아닌 이 지면을 빌어 작금의 멀티플렉스와 소소하고 어설프게나마 비교 고찰하고자 하는 극장, 동시상영관이다.
자 그럼 우리 다같이 오욕의 시대 한 저편에 의연하게 기거하며 재래식 영화관의 아우라를 한 없이 사정했던 우리들의 해방구 '동시상영관'(일명 삼류극장)의 호황기로 돌아가 보자. 아~~시작도 하기 전에 그 당시를 회상하려고하니 쏟아지는 닭똥 같은 노스텔지어의 눈물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 다품종 소량생산의 미래지향적 상영방식
영화를 만들어내는 생산자와 그 결과물을 소비하는 수용자들에게 있어 어떠한 점이 그토록 긍정적으로 작용되기에 멀티플렉스관이 곳곳에 불쑥불쑥 들어서는 것일까? 이것은 문화로서의 영화가 아닌 산업으로서의 영화로 보편적 인식이 바뀌면서 배출된 필연적인 자본주의적 과정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수용자 측면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잖아요", "구경거리가 많잖아요." "영화 외에 다른 일도 일사천리로 해결할 수 있잖아요"처럼 개인적인 기호와 많은 이점에 의해서 배태된 배설물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즉, 멀티플렉스의 장점인 3M(Multi-screen, Multi-service, Multi-entertainment)을(에) 적극적으로 활용(당)하겠다는 의지와 다름없다.
그렇지만 이 중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정답 같고 꼭 정답이어야 할 정당성을 가진 올곧은 답은 '선택의 다양성 확보'라는 것이다. 한데, 현재 펼쳐지고 있는 멀티플렉스의 점입가경적인 왜곡된 다양성의 지랄은 무엇인가? 몇 백 개가 넘는 스크린 수에 열 개도 안 되는 작품들이 90%이상을 휘어잡고 죽돌이 죽순이 마냥 죽치고 있으니, 이거 어디 언감생심 가진 것 없는 영화들은 얼굴한 번 내밀 수 있겠냐는 말이다.
이는 분명, 내밀한 가치와 민주적인 수순 없이 오로지 화폐만을 좆는 천민적 자본주의의 몰도덕성을 전제로 한, 영화의 본질적인 것과는 상관없이 한 방에 그냥 스크린 수 접수 확보해 끝장을 보자는 최소한의 손익분기점을 넘기 위한, 술책에 다름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 이건, 마구 배팅 부풀려 한번에 크게 먹겠다는 도박심리와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마케팅 비용이 수년 전과 비교해 다섯, 여섯 배로 뛰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고로, 이런 전차로 인하여 멀티플렉스는 말만 멀티지, 그 내실을 따져보면 그 밥에 그 나물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향수어린 동시개봉관의 경우를 보자 이들은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각각의 극장의 룰에 따라 1주일 또는 2주일 단위로 손님이 오든 말든 틀 때 틀고 간판 바꿀 때 어김없이 체인지 한다. 물론, 이들이 뭐 대단한 문화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돈에 모든 것의 당락이 결정되는 가공할만한 속도전에 덜 민감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 동네에서 하는 상영작 다리건너 저 동네에서 하는 경우, 삼류극장은 거의 전무했다. 수많은 다종다양한 영화들이 한 곳에 몰리지 않고 제 각기 흩어져 복음을 전파했다는 방증이다. 참으로 선택의 깊이와 너비측면에서 이때만한 시절도 없었다고 술회하고 싶은 대목이다. 결국, 요즘처럼 '풍요속의 빈곤'이 아니라 ‘빈곤속의 풍요’라는 차이의 여흥을 자아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본질적으로 동시상영관의 영화 자체만 봐도 이건 완전히 양수겸장(兩手兼將)이요 일타이피의 효율성의 그것이었다. 당시의 에로키드였다면 분명 알고 계실 거다. 동시상영작 두 편이 우리들을 다 끌어 당겨 극장에 왕림한 경우보다는 오로지 한 영화만이 보고 싶어 올망졸망 지기들과 모여 발길을 지긋이 옮겼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때 눈길 반 푼어치도 주지 않던 한 편의 상영작, 지금 뒤돌아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시대의 걸작들이었던 경우가 태반이다. <파리텍사스>, <캣피플>, <여왕벌>, <엔젤하트>, <괴물>, <이블데드>, <바보선언> 등이 그렇다. 그만큼 삼류 극장은 성격을 달리 하는 영화 두 편을 편성 배치하는 아주 이상적인 상영방식을 통해 암암리에 관객들에게 감성과 지성을 동시에 전달해주는 의미 있는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어쨌든, 첫 단락의 핵심을 정리해보자면 전근대적인 동시상영관은 놀랍게도 탈포드주의의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미래지향적인 유연성 있는 메커니즘을 일정부분 담지하고 있었고, 역으로 근대적인 멀티플렉스 영화관은 다양성이라는 기치와는 배치되는, '소품종 대량생산'이라는 전근대적인 포드주의의 구태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 경제적이고 실속적인 화폐사용의 전범(典範)
이것이야말로 동시개봉관의 최대미덕이 아니겠는가? 솔직히 문화생활의 하나인 영화 관람을 맞닥뜨리는데 있어 반대급부가 7천 원 정도하는 거 절대 비싼 건 아니다. 다만, 80년대의 입장료(1000원 또는 1200원)를 생각해보면 상대적으로 많이 점핑했다는 것뿐이다 .
현재의 입장료는 여러 방법에 따라 할인이 되는 실정이다. 물론, 그 시절에도 나름대로 합리적이라면 합리적이라 할 수 있는 생활 밀착형 입장료 차등제가 있긴 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지들끼리 과당경쟁을 하다 험악한 소리 새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사례를 들자면 이렇다. 당시에 중.고딩들이 제일 많이 드나들던 곳은 떡복기 집. 오락실. 짱깨집이었다. 바로 이곳이 뒷거래를 성사시키는 거점지역으로, 극장주는 각각의 업소와 커넥션을 이뤄 상영 중인 영화 포스터를 그들에게 제공, 한 쪽 구석에 살짝이 붙이도록 요구한다. 그에 따른 대가로 극장주들은 주인들에게 약간의 돈을 제공하거나 아니면 영화 상영에 앞서 예의 그 에코 사운드를 잔뜩 먹인 성우들의 명랑한 목소리에 맞춰 스크린을 통해 업소를 소개해준다. “신속한 배달! 맛나는 춘장의 세계 홍콩~옹옹옹 반..반반반 점....점점점점점”
그러면 그 업소에서는 손님들이 음식을 시키면 영락없이 400원 정도의 극장 할인 티켓을 아무 말 없이 식탁에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아줌마는 하던 일 마저 하신다. 그리고 손님들이 돈 계산하고 나갈 때 심드렁하게 한 마디 던지신다. “우리 아들이 그러는데 저 영화 되게 재미다고 그러대” 정말이지, 이것이야말로 인간적이고 살맛나는 비즈니스 관계가 아니던가!
이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동시개봉관은 또한 대기실에 비디오나 TV를 항상 구비, 시간 남아 엄한 데 돈 쓰지 않도록 환경을 조성해 놓았었다. 결정적으로, 돈은 없고 영화가 너무 보고 싶을 때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그 시대가 인간적인 시대였던 만큼 그때는 이렇게 해결했다.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이 나가고 들어오며 인산인해를 이룰 때 그냥 그 틈을 타 출입구를 향해서 뒤도 안돌아보고 냅다 뛰는 것이다. 걸리면 몇 대 줘터지지만 그 출입문만 통과하게 되면 이건 완전히 치외법권 지역과 같은 효과를 발휘하게 돼 그냥 날로 입장료 굳는다. "정말로 경제적이지 않나?" 치사스럽다고, 지금이야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진짜로, 워낙 빈번해서인지는 몰라도, 별 거 아니었다.
▶ 영화 간판의 변화
허나, 우리의 동시개봉관의 간판은 장인의 정신으로 똘똘 뭉치신 화백의 붓으로 직접 주조되어온 마스터피스 그 자체라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터, 분명 남다른 애정이 깃든 작품이었다. 그럼으로써, 영화를 보는 행위와는 관계없이 그곳을 지나가는 여러 시민들에게 갤러리에서나 만끽할 수 있는 문화 체험과 시선의 즐거움을 당시의 간판들은 길거리에서 제공해줬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현 상황에서는 다음에 무슨 영화가 상영되는지 알려면 인터넷이나 인쇄매체를 뒤적거려야만 하지만 그 당시에는 친절하게도 상영작 그림 옆에 다음에 틀을 영화의 간판 또한 살포시 얹어주는 신속성과 성실성을 보여줌으로써, 다리품을 안 팔고도 정보를 쉬이 얻을 수 있도록 우리를 배려해줬다.
그나저나 그 시대의 대형 간판그림을 그리시던 장인들은 뭘 해 잡고 이 풍진 세상살이에 맞서 생활하고 있으신지 정말이지 궁금하다.
▶ 배째라 형식의 진보적 측면
80, 90년대는 분명 군바리 아자씨들이 중원을 평정한 광풍의 시대였다. 그럼으로써 문화의 스펙트럼 또한 그 폭압적인 자장 안에 유폐돼 있었고. 그래서 그 당시에는 영화 시작하기 전 애국가, 대한늬우스(땡전뉘우스와 붕어빵), 문화영화를 차례로 틀어 건전가요의 정치적 의도와 유사한 이데올로기를 버르장머리 없이 국가가 극장 안에서 전파했다. 그 와중에서도 무척이나 웃겼던 것은 애국가가 장엄하게 울려제껴질 때 다 같이 마지못해 기상해 스크린에 누가누가 머리 큰 가 비교고찰당하는 듯 지머리 투사됨의 쪽팔림을 당해야만 했다는 거. 생각만 해도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바로, 이러한 덜떨어진 영화정책에 강한 불만?을 품은 삼류극장은 개혁의 영도자로 나서며 변화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들은 과감하게 애국가 및 대한늬우스를 검열하듯 가위로 뚝딱 잘라버리고 문화영화 또한 구소련출신의 세르게이 에이젠인쉬타인의 몽타쥬 기법을 차용해 과감한 시간압축편집방식으로 상영하는 획기적인 실천적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혹세무민에 압사당할 뻔 했던 관람객들의 의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지대한 공헌을 했다. 때로는 아예 상영불허조치를 내부적으로 결정 그냥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이렇게 안 했다간 삼류 극장에 손님 안 든다. 그리고 그런 거 일일이 다 상영하면 일류 극장이지 삼류 극장 아니다.
영화 본질적인 측면에서의 진보성은 다름이 아니라 예나 지금이나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는 남녀 성기, 하트 모양의 스프레이로 떡칠하는 문제다. 역시나 삼류 극장은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패착을 그냥 둘리 만무했다. 수전증 만빵인 프레임의 흔들림과 피사체의 발 빠른 움직임으로 인해 거시기를 포착하지 못하고 엄한 피사체에 하트를 위치시킴으로써 해학미를 창출하고 동시에 모든 것을 다 뽀록내는, 지난한 시대에 정면으로 맞장 떠 도전하고자하는, 기백과 옹골찬 의중을 보여주었던 것이었다. 또 참고로 위의 사진을 봐 봐라! 이게 영화의 장면이라 볼 수 있는가! 완전 애들 색종이 붙이기 놀이하는 꼴이지.
그럼, 멀티플렉스는 진보적이라는 조어와 매치될 수 있는 요소가 있을까? 한 가지 있다. 외형의 쭉쭉빵빵화. 허나, 내부도 이와 맞물려 같이 진화됐는지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마치 각종 뽕으로 앙상한 부분을 꽉꽉 채워 치장한 듯한 그 거북스런 느낌, 그 느낌이 현재로서는 너무 생생하다.
지금까지 그리 건전하다고 할 수만은 없는 필자의 소싯적 추억에 휘감겨 동시상영관에 관해 몇 자 적어 봤다. 하지만 뭔가 허전하다는 공허감 지울 길이 없다. 아마도 너무나도 많이 변해버린 극장의 환경에 격세지감을 느껴 그러한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멀티플렉스 상영관이 재배치 및 지향해야 될 점은, 부차적 변수인 쌔근하고 잘빠진 시각의 미덕보다는 영화 관람과 직접적 연관성이 있는 콘텐츠의 다양성 및 내부시설의 완벽함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허나, 작금의 상황에서 쉽게 목도되고 있듯 지향해야 될 것은 뒷전으로 밀려난 상태고 지양돼야 될 것들은 사기가 충천해 끊임없이 속도를 높이며 앞으로 달려가는 것 같다. 그러다 밑이 보이지도 않는 아득한 벼랑길로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