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의자에서 일어서는 순간 사르르 녹아 날아가 버리는 가볍고 달착지근한 영화를 보고싶은가? 그렇다면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은 피해야 할 선택 1순위가 될 것이다. 우선 영화에 홀딱 반해버린 요컨대 ‘지지자’들은 극장 불이 켜지거나 말거나 의자에 그대로 눌러앉은 채 방금 본 영화에 대한 황홀한 백일몽 속으로 젖어들 것. 반면 자신의 선택을 속절없이 후회하며 영화에 대해 성토하기 바쁜 ‘반대파’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뭐 지지자건 반대파건 얼얼한 뒷통수는 기본 사양이고. <도그빌>에는 어쨌든 그만한 위력이 있다.
대자본이 없이도 스펙터클을 창조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라스 폰 트리에는 대단한 테크니션이자 도그마 선언의 주창자로 유명하다. 도그마 선언의 기본 취지는 누구나 영화를 찍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핸드헬드(들고찍기)를 이용한 흔들리는 피사체와 흐릿한 영상은 폰 트리에의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하다. 한편 2000년 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어둠 속의 댄서>는 이 감독에 대한 반응들을 한층 더 양극화시키는 결과를 낳은 작품. 폰 트리에의 비판자들은 영화의 신파성과 함께 “장식을 최소화한다”는 스스로 세운 원칙을 위반한 감독을 말만 앞세우는 사기꾼이라고 비난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보다 강한 모성애로 무장한 셀마(비욕)가 벌이는 사투에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처음으로 찾아온 어려움이 형식에서 유래한다면, 내용상의 난관 역시 그에 못지 않다. 이윽고 영화는 갱들의 추격을 피해 마을 주민이라고 해봐야 달랑 열 다섯 명인 깡촌 도그빌로 숨어든 그레이스(니콜 키드먼)의 고난사를 하나하나 펼쳐 보이기 시작한다. 순박해 보이던 마을 사람들은 시간이 가면서 점차 돌변하기 시작하고, 급기야 그녀는 마을 전체의 노예로 전락한다. 남자들은 이 꽃 같은 아가씨의 육체를 유린하고, 심지어 목에 묵직한 개목걸이를 채우는 만행마저 서슴지 않는다. 한편 유일한 희망이었던 톰(폴 베타니)마저 ‘적들’에게 그녀를 밀고함으로써 철저히 연인을 저버린다. 이 ‘개 같은 마을’ 도그빌에서 벌어지는 모든 야비한 행위들을 도리 없이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 그건 관객에게도 시험에 가깝다.
사실 인간 마음속에 내재한 어두운 본성이라는 주제는 더 이상 그리 새로운 내용이 되지 못한다. 거기 더해 <도그빌>이 앞으로 나올 <만델레이>, <워싱턴>과 함께 미국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소위 미국 3부작의 첫 번째 편이라고는 하지만, 엔딩 장면을 제외한다면 유독 미국을 꼬집어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도 힘들다. 그리고 사실 영화는 미국의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보다는 “권력을 쥔 자는 과연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 쪽에 무게중심을 둔다. 현실에서 칼자루를 쥔 쪽이 의심할 바 없이 미국이고 보면, 바로 그런 견지에서 <도그빌>은 미국을 비판하는 영화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도그빌>의 진짜 놀라운 점은 주제나 형식상의 실험 자체보다는 감정을 쥐고 흔드는 라스 폰 트리에의 재간에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가 시작한지 오래지 않아 관객은 금세 자신이 현실(엄밀히 말해 현실에 가깝게 재현한)의 공간이 아닌 텅 빈 공터의 하얀 금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될 것. 그레이스의 끔찍한 수난사에서부터 영화 말미에서 벌어지는 ‘관계 역전’의 순간까지 영화는 내내 습격처럼 관객을 덮쳐온다. 전작들에서도 증명한 바 있듯, 감정을 휘어잡는 데 있어 폰 트리에는 독재자에 가깝다. <도그빌>을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인 걸작의 범주에 넣어야 하느냐, 아니면 혹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철저히 계획된 속임수일 뿐이냐에 대한 해답, 혹은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진부한 표현 그대로 관객일 뿐이다. 어쨌든 확언할 수 있는 사실은 두 가지. 첫째로 <도그빌>은 의심할 바 없이 흥미로운 문제작이며, 둘째, 무엇보다 178분의 러닝타임 동안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