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양이의 보은' 하루와 고양이 남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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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여름, 어느 토요일 극장 앞. <고양이의 보은>을 보고 극장을 나서던 때의 상쾌함이 아직도 손에 잡힐 듯 하다. 당시 광고에서는 <고양이의 보은>의 주인공 하루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주인공 치히로의 고등학생 버전으로 선전했지만 이게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것쯤이야 다들 알고 있을 터. 치히로가 고등학생이 될 만큼 성장한다면 꽤 당차고 선굵은 소녀가 되었을 테지, 하루하루를 지루하게 보내는 하루 같은 평범한 학생이 되지는 않았을 게다. 그런 마케팅 전략은 흥행을 위한 일종의 안전조치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바이다. 그러나 <고양이의 보은>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만은 못해도 꽤 좋은 흥행성적을 거둔 것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국내 흥행 성공사례가 되어있다는 점에서 크게 보면 <고양이의 보은>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빚진 것으로 볼 수도 있긴 하지만 작품이 재미있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몇 달 만에 다시 비디오로 본 <고양이의 보은>은 여전히 좋은 느낌이다. 그리고 새삼 느끼지만 정말 미니 미니 미니... 하다. <고양이의 보은> 제작노트를 보면 <고양이의 보은>은 스튜디오 지브리의 세대교체를 염두에 둔 첫 번째 기획작품이라고 하는데, 중요하지 않은 경기에서 신인 선수를 출전시키는 감독의 배려쯤 된다고 볼 수 있을까?
<고양이의 보은>을 다시 보고 그 원작이라는 히라기 아오이의 만화 <바론 고양이 남작>을 살펴보았다. <바론 고양이 남작>은 <고양이의 보은>과 줄거리가 같지만 예쁜 고양이 유키와 하루의 관계나 고양이 왕국의 성격이 좀더 분명하게 드러나며 룬 왕자의 역할이 축소되는 등 세부적인 사항에서 좀 차이가 나는데, 그림체가 다르며 진짜 원작인지 약간 의구심이 들 정도로, 개인적으로 썩 만족스러운 작품은 아니었다.
| '바론 고양이 남작' 정식 한국어판 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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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베르트 폰 지킹겐 남작, 즉 고양이 남작이 등장하는 또 다른 애니메이션으로 <귀를 기울이면>이 있는데, 여기서 인형으로 등장하는 남작의 모습은 휘날리는 옷깃에까지 폼이 스며들어간 살아 움직이는 남작보다 훨씬 신비스럽다. 여하튼, <고양이의 보은>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나 <모노노케 히메>, 지브리 작품은 아니지만 <은하철도 999> 같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 혹은 인간의 본질 등 묵직한 주제에 천착하는 영화가 아니다. <고양이의 보은>은 거대한 야심 없이 그저 아기자기하고 귀엽게 만든 작은 영화지만, 이 영화에 불만을 가질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고양이의 보은>은 지루한 일상에 식상했으며 좋아하는 남자아이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평범한 여고생 하루가 차에 치일 뻔한 고양이를 구해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하루 앞에서 놀랍게도 두 발로 일어선 고양이는 은혜를 갚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지는데, 이 고양이는 고양이 왕국의 왕자인 룬으로 밝혀진다. 고양이 왕국의 대왕은 하루를 룬과 결혼시키려 하고, 하루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이끄는 대로 고양이 사무소 지구옥을 찾아가 훔베르트 폰 지킹겐 남작을 만난다.
<고양이의 보은>에서 보은은 두 가지다. 첫째는 하루를 룬 왕자에게 시집보내려는 고양이 대왕과 그 신하들의 보은이며 두 번째는 고양이 유키의 보은인데, 유키가 하루에게 입은 은혜의 정체는 영화의 후반에 가서야 밝혀지며 유키의 보은이야 말로 <고양이의 보은>의 진정한 의미이다. 성격은 제멋대로이며 행동거지가 우아하고 약삭빠르기로 정평이 나있는 고양이가 이렇게 <고양이의 보은>을 통해서 은혜를 갚는 동물로 등장하는데, 사실 이것은 하루가 주위에 애정을 베풀 수 있는 마음을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고양이의 보은>에서 고양이 남작은 몇 번에 걸쳐 하루에게 자신의 시간을 살라는 말을 남기며 무타는 고양이 왕국에 대해 그곳은 자신의 시간을 살 수 없는 녀석이나 가는 곳이라 하는데, 영화를 통해서는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힘들다. 사실 <고양이의 보은>의 진짜 교훈은 작은 목소리에라도 귀를 기울이라는 것 아닐까. 이렇게 되면 <고양이의 보은>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숨은 것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는 영화가 된다. 영화 제목대로 <귀를 기울이면>, <고양이의 보은>이 있을 것이다.
| '귀를 기울이면'의 고양이 남작 인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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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고양이의 보은>이 시작했을 때의 하루와 끝날 때의 하루가 어딘가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하루는 한 단계 성장한 것인데, 그것은 하루가 짝사랑하던 남자의 이별 소식에도 의연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통해 부각된다. 그러나 그 성장은 심각한 내적 고통 대신 한바탕 모험 끝에 이뤄진다. 이 모험을 시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모험은 심각해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주인공은 성장한다. 하루의 성장을 지켜보는 관객들에게 주인공의 내적 고통에 동감해야 할 무거운 짐을 덜어준다는 점에서 <고양이의 보은>은 다시 한번 작은 영화의 본령을 드러낸다.
<귀를 기울이면>에는 주인공 소녀가 전철에서 만난 고양이를 쫓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귀를 기울이면>, 혹은 <이웃집 토토로>, 아니면 <고양이의 보은> 등을 보면 등장인물들이 뭔가를 끈질기게 뒤쫓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행위를 통해 인물들은 다른 세계와 다른 존재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토토로일 수도, 고양이 사무소일 수도 있다. 어쩌면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힘 또한 뭔가 끈질기게 뒤쫓아 왔다는 데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