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만 되면 전국 곳곳의 숙박업소가 터져나갈 듯 만원을 기록하는 대한민국에서 크리스마스는 서양과는 좀 다른 명절이다. 그러나 동서양 공통인 점이 있다면, 그건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내는 것만큼 비참한 일이 세상에 또 없다는 것.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는 "일년에 한 번 섹스를 한다면 그건 크리스마스"라는 소박하게 음흉한 명제에서 출발한다. 이 지역 건달인 석두 패거리가 운영하는 유흥업소 '섹쉬궁'의 이름만 보아도 미리 짐작할 수 있듯, 노골적이고 촌스럽지만 어딘가 귀여운 영화 속 유성은 그곳 출신인 이건동 감독의 표현에 따르면 "귀여운 에로의 도시"다. 아닌 게 아니라 밤만 되면 네온사인 번쩍이는 유흥가로 옷을 갈아입는 이 지방소도시는 실은 영화의 진짜 주인공.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둔 초보순경 성병기(차태현)의 포부는 두 가지다. 첫째로 오랜 원수―사실 병기 쪽의 일방적인 원한이긴 하지만―인 깡패 방석두를 무찌르는 것, 둘째는 그간 몰래 지켜봐 온 볼링장 아가씨 허민경과의 사랑을 이루는 것. 그러나 조폭을 일망타진하기는커녕 거대한 포순이 탈이나 뒤집어써야 하는 작금의 신세가 혈기방장한 청년은 서글프기만 하다. 한편 크리스마스가 생일인 민경(김선아)은 성탄 즈음마다 남자에게 채이는 묘한 징크스의 소유자.
무식하지만 <러브레터>에 눈물을 쏟을 정도로 대책 없이 로맨틱하기도 한 온천파 두목 방석두(박영규)에게도 올해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각별하다. 석두는 민경이 뱉은 침에 애꿎게 이마를 맞은 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강렬한 열정에 휩싸이고, 두 명의 숙적이 한 여자에게 반하면서 예고된 파란의 막이 열린다. 여기 한 몫 끼어드는 건 '크리스마스에는 여친과 따땃하게 한 판...'이라는 사심으로 똘똘 뭉친 유성의 십대들과 온천파 건달들, 그리고 "산타도 남자다!"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펼치는 에로영화 <에로 크리스마스>의 제작진이다.
차태현, 김선아의 크리스마스용 로맨틱 코미디라. 이 문장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환기할 이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까지도 없을만치 명백하다. 단지 뻔하다, 는 의미라기보다 두 배우가 지닌 메리트와 한계가 그만큼 명확하다는 얘기. 사실 청춘남녀의 로맨스를 곁들인 좌충우돌 코미디라는 장르에 있어 차태현, 김선아 두 배우는 무시 못할 권능의 소유자들이다. 배우의 개인기와 굳건한 기존 이미지에 기대 좀더 안전한 행로를 택할 수도 있었을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는 그러나 주인공의 주변부로 자꾸만 시야를 확대한다. 거기다 "원래는 로버트 알트만의 <숏컷>처럼 다양한 인간군상에 대한 스케치를 담고 싶었다"는 이건동 감독의 포부까지 듣고 보면, 귀여운 차태현 루돌프와 섹시한 김선아 산타를 내세운 포스터를 보고 우리가 짐작했던 '그 이미지'가 실은 오산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는 비정하리만큼 도드라지는 코미디와 상큼한 사랑 대신 소박하고 꾸밈없는 추억담의 옷을 입는다. 등장인물이 워낙 많은데다 조연에 얽힌 에피소드가 상당부분 편집에 의해 잘려나간 탓에 특히 후반부에 이르면 헐겁고 밍밍한 느낌을 준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특징. 그러나 보잘것없는 군상들의 화려하지 않은 크리스마스 이야기 안에는 꽤 훈훈한 온기가 있다. 이를테면 초콜릿무스를 상상했더니 군고구마가 나오더라고 할까. 둘 중 어느 쪽이 더 맛있냐는 질문에는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오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손을 들어주겠다. 우리가 크리스마스에 원하는 모든 것(머라이어 캐리나 <러브 액츄얼리>의 꼬마숙녀가 노래하듯 "All I Want For Chiristmas"다)이 결국은 따뜻한 온기라고 할 때,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는 미리 가졌던 선입견보다 '들통난 정체'가 좀 더 나은 영화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