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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리뷰 코너에 신작 비디오라는 이름이 붙은 이후로는 묵은 영화 이야기를 꺼내기가 적잖이 어려워졌다. 하긴 한 주 사이에도 거의 네다섯 편, 적어도 두 편, 많으면 일곱 편 정도의 영화가 개봉되고 개중엔 하루 이틀 상영한 후 바로 비디오로 출시되는 작품, 아예 극장에 걸리지 않고 출시되는 작품도 많으니, 비디오 리뷰를 쓰는데 있어 그중 하나를 선정하는 게 그리 까다로운 일은 아니며 또한 새로 나온 작품을 고르는 것이 코너의 본의에 어울리는 일일 터이다.
지금 얘기할 <토탈 리콜>이란 영화는 만들어진지 거의 15년이 된 작품인데, 난데없이 <토탈 리콜>을 고른 것은 일전에 시청한 <출발 비디오 여행>의 <결정적 장면> 코너 때문이었다. 그 날 방영분을 처음부터 시청하진 못했지만, 결론인즉슨, 아놀드가 연기하는 주인공 더글라스 퀘이드(혹은 하우저. 소설에서는 퀘일)는 현실이 아닌 가상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오래 전 영화를 두어 번 봤지만 단순한 더글라스 퀘이드라는 영웅의 모험담 이상으로는 생각할 수 없었는데. 주변에서 <토탈 리콜>을 본 사람들의 견해도 크게 갈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경험한 것은 실제인가, 환상인가? 여기에, <블레이드 러너>부터 <페이첵>까지 줄줄이 영화화되는 필립 K. 딕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소설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토탈 리콜>의 원작인 필립 K. 딕의 단편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We Can Remember It For You, Wholesale>은 번역이 되어 있다. 이외에도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 : 영화 제목은 블레이드 러너>, <사기꾼 로봇 Imposter : 임포스터>, <마이너리티 리포트, The Minority Report : 마이너리티 리포트>, <두번째 변종 A Second Variety : 스크리머스> 등이 영화로 제작된 그의 소설들 가운데서 번역이 되어있는 작품들이다. 이것말고 또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페이첵>의 원작은 번역이 되어 있을까?
그 유치한 환상의 내용이 무엇인지,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직접 읽어보는 게 좋다. 여하간 이 단편 소설은 기막히기 짝이 없으며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허를 찌르는 블랙 유머를 보여준다.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는 <로보캅>, <원초적 본능>을 만든 폭력의 거장 폴 버호벤을 만나 SF 액션 영화로 진화한다. 그의 단편 <두 번째 변종>에서 살상용 갈고리 발톱이 인간을 잡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하듯.
<토탈 리콜>은 다시 봐도 박진감 넘치는 액션 영화일 뿐만 아니라, 풍부한 해석의 여지를 깔고 있는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토탈 리콜>의 배우들로는, 우선 10년 후 만든 로저 스포티스우드 감독의 <6번째 날>에선 뒤뚱거린다는 말까지 들었지만 이때까지는 쌩쌩하고 팽팽한 아놀드 주지사가 있다. 그리고 악역으로 등장하는 1990년대의 여신 샤론 스톤, < V >의 햄 테일러, 마이클 아이언사이드까지. 오히려 아놀드의 상대역인 주연 여배우 레이첼 티코틴의 지명도가 너무 처진다는 생각이 든다. 배우들 외에도 <토탈 리콜>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상상력 넘치는 특수효과다. 어린 학생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던 가슴 세 개 달린 여자, 지하철의 총기 검색기와 더불어 사람의 얼굴이 여섯 조각으로 갈라지면서 아놀드의 얼굴이 나오는 부분은 얼마나 사람들을 흥분시켰나. 그리고 뛰어난 액션을 아우르는 긴장감. 퀘이드가 리콜의 박사를 만나 알약을 먹을지 고민하는 장면, 운명을 가르는 땀 한 방울! 이 영화 최고의 장면인 동시에 그야말로 압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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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나 틀리나 따지는 것을 잠시 떠난다면 <토탈 리콜>의 다의성은 많은 즐거움을 준다. 이 영화에서 또한 재미있게 생각한 것은, 더글라스 퀘이드와 하우저의 관계이다. 화성의 지배자 코하겐은 퀘이드를 이용하여 반란군 지도자 쿠아토를 제거하는데, 그때 나타나는 하우저의 영상은 자신이 반란군을 소탕하기 위해 일부러 퀘이드가 되었음을 말해준다. 그 영상은 조작된 것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그는 퀘이드인가, 하우저인가? 이런 정체성의 문제도 끄집어낼 수 있으며, 퀘이드가 가상 속에 있다고 가정할 때, 그 시점을, 퀘이드가 처음 리콜 회사를 찾아갔을 때가 아닌, 반란군들이 패하고 그와 멜리나가 사로잡혀 강제적으로 기억을 이식받은 후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마지막 해석은 나 스스로 말이 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냥 그렇게 생각해보면 재미있을 것이라고 여겼을 뿐이다.
<토탈 리콜>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몇 년 후에 만들어진 <매트릭스>와의 연관성이다. 박사가 퀘이드에게 약을 권하는 장면 뿐 아니라, 퀘이드가 리콜 회사를 찾아가서 수술을 받는 장면에서는 매트릭스를 62-B-37에 맞추라는 대사가 나온다. 혹시 <매트릭스>의 제목이 여기서 나온 것은 아니겠지?
<토탈 리콜>은 정말이지 쉽게 보면 쉬우며, 어렵게 보면 한없이 어려운 영화다. <토탈 리콜>에서도 <매트릭스>처럼 철학적인 문제들을 여럿 끄집어낼 수 있지만, 반대로 아무 생각하지 않고 즐기기에도 충분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제대로 된 상업 영화란 이렇게 양면을 고루 갖춰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