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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고객 님께서는 지금은 통화중입니다” | 2004년 3월 4일 목요일 | 협객 이메일

내 손안의 작은 핸드폰= 나(자신)
내 손안의 작은 핸드폰= 나(자신)
소녀가 말을 한다. “나 명품 옷도 사고 싶고, 친구들과 여행도 가고 싶어.. 근대 돈이 없어 그래서 알바를 해야겠어” ........ 이어지는 말이 만약, 무슨 아르바이트가 좋을까? 라는 질문이라면 당신은 어떤 일을 추천하겠는가?

보편적인 대답이 쏟아져 나오겠지만 소녀가 이쁘장하게 생기고 당신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사는 무기력한 기성세대의 남성이라면 우리는 단숨에 ‘원조교제’라는 단어를 머리 속에 공유할지도 모른다. 이 생각이 비관적일지는 모르지만 ‘원조교제’는 이제 생경한 단어가 아닌 입안의 껌처럼 “딱딱” 소리를 내는 ‘익숙함과 거북함’이 공존하는 단어가 된지도 오래이다.(‘익숙함’은 우리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미디어의 가공할 만한 능력 앞에 무너진 우리의 ‘열패감’이다)

김기덕 감독의 10번째 영화 <사마리아>는 원조교제를 하는 두 소녀와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원조교제’라는 소재가 주는 파격성과 논란과는 달리 김기덕은 득도한 듯한 평안한 어투로 영화 안에서 ‘용서와 구원’을 그린 작품이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바수밀다와 사마리아를 두 소녀의 얼굴과 포개지게 만들어 이런 그의 영화적 변화를 다소 실감케 한다. 허나, 나쁜 남자(?)였던 감독이 개과천선에서 새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은 섣부른 것이고 또한 <사마라아> 안에서 보여준 그의 변화도 징후에 가깝기에 모든 판단은 시기상조다.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사마리아>, 이 상은 주로 논란의 대상만 되었던 그의 영화가 이젠 세계가 인정하는 작품이 되었다는 표시로써 기능 한다.
김기덕 감독 영화의 찬반논란을 떠나서 <사마리아>는 이제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또한 이 영화는 그의 말처럼 분노하는 마음을 억누르고 용서와 화해를 통해 ‘고요’해 지라고 명한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고요’가 왠지 소통불능인 현대인이 느끼는 적막감과 비슷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이라는 타이틀을 걷어내고 보니 영화 자체가 주는 의도된 상징성들이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말을 해! 아빠는 다 알고 있어..
말을 해! 아빠는 다 알고 있어..
바수밀다로 자기를 불러 달라는 재영(서민정)은 친구 여진(곽지민)이 원조교제를 경멸하면서도 자신의 일에 동조하는 그 마음을 오히려 위로한다. 여진은 자기를 하늘같이 떠받들고 사는 형사 아버지 영기(이얼)의 해외토픽(종교적)을 매일아침 지루하게 듣는 딸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여진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저 곱고 이쁜 딸, 재영이가 보는 여진은 착하고 이해심 많은 베스트 프랜드인데, 사실 여진은 유럽여행이라는 물질적 욕심에 친구를 파는 포주고 아버지를 속이는 나쁜 딸이다. 이렇게 이들은 자기 식대로 상대방을 보면서 말은 하되 진정한 대화는 없는 개개인으로 나누어진다.

그런 어느 날 창녀 짓을 하던 재영이 마치 진짜 바수밀다가 된 듯한 표정으로 여진 앞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아버지는 친구의 뜻을 이어받아 사마리아가 되려는 딸을 여관 촌 앞에서 목격한다. 이때부터 이들은 (진정한) 소통을 시도한다. 하지만 이 노력은 너무 늦어버린 용서와 구원의 제스쳐로 보일 뿐이다.

온전히 원조교제를 영화적 소재로 본다면 이 두 소녀를 이렇듯 창녀로 만들어 버리는 사회는 이 영화 안에서 객체로써 기능 한다. 그러기에 세 주인공은 주체로써 더 많은 상징성과 감독의 의도된 관계로 고리를 맺는다.

재영이는 여진이 섭외(?)한 남자와 섹스를 하고 돈을 받는다. “더러워, 내가 더러워?”라고 묻는 남성에게 재영은 사랑을 느끼고 여진은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지만, 여전히 이들은 작은 핸드폰을 통해 남성을 구하고 관계를 이어간다. 그렇기에 재영과 여진은 도플갱어 같은 서로 모순된 하나의 주체로 묶인다.

원조교제를 사회 문제로 보기보다는 인물들에 관계의 고리로 해석한다면 소녀를 품에 안은 남성은 아버지와 동일시된다. <사마리아> 안에서 여인을 대하듯 늦잠 자는 딸을 깨우는 아버지(아직 딸이 육체적으로 순수할 때)와 창녀가 된 딸에 잠자는 모습(육체)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변한 것이 없다. 달리 말해 아버지를 남성 즉, 부조리한 사회로 확장 해석한다면 이들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가족계보에서 오는 친근한 소통보다 육체적 관계의 이성으로써 각각의 주체로 떨어져 나온다. 아버지는 딸을 안을 수 없고 딸은 아버지를 남자(이성)로써 사랑할 수 없는 관계이다. 결국 남성(아버지)은 나이 어린 소녀를 안으려하고 소녀는 나이 많은 남성의 품에서 아버지를 발견하고 용서와 구원을 받으려한다.

이런 모순 때문에 아버지와 딸은 소통을 할 수 없고 딸(여진)은 거리로 내몰린다. 딸은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으로 핸드폰을 통해 “제가 위로해 줄께 요. 빨리 와요”하면서 아버지 같은 남성의 품에 안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아버지는 핸드폰 넘어 들려오는 딸의 목소리로 오열한다.

제가 위로해 줄께 요~
제가 위로해 줄께 요~
그래서 이 세 사람의 관계는 현실적이지 않고 신화적 관계로 보여 영화는 내내 모호하다.
엘렉트라 컴플렉스로 해석되어 지는 부녀지간의 이 비극적 관계는 딸과 마주할 수 없고, 현대 사회의 양면성이 내재된, 핸드폰이라는 기계를 통해 딸이 알선하는 소녀(재영)를 안는 남성을 탄생시키는 부조리를 드러낸다.

결국 이런 부녀 관계는 극 안에서 겉돌았던 재영과 영기를 (암시적으로) 이어주는 타당성을 제공하고 여진은 그들을 이어주는 “핸드폰” 역할을 한다. 때문에 이들 셋은 한번도 진심 어린 소통을 하지 못한다. 핸드폰 안에만 존재하는 딸에게 아버지는 그저 딸을 대신할 수 있는 소녀를 찾을 뿐이다.

아버지(남성)는 딸을 용서하고 딸은 아버지를 구원한단다. 웃기다. 김기덕이 말한 “구원과 용서”는 이 영화 안에서 어디에도 없다. ‘원조교제’를 통해 서로를 용서하고 구원하려는 신화적인 세 인물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사마리아>는 일정 부분 이해되고 나머지 부분은 용납조차 거절되는 김기덕 표 영화계보를 잇는다. 즉, 김기덕은 여전히 남성의 가학적 시선으로 여성과의 관계를 규정짓는 미시적인 의미만 던졌다는 말로 바꿔 말할 수 있다.

그래도 이 영화 안에서 관객에게 화해(?)의 제스쳐를 보였다는 감독 말을 굳게 믿고 ‘구원과 용서’를 찾고 싶다면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도록 스스로 ‘믿음’이라는 단어를 상기시키면서 오래도록 자신을 다독여야 할 듯싶다.

<나쁜 남자>의 이란성 쌍둥이, <사마리아>는 여전히 ‘소통불능’ 통화중이다.

2 )
ejin4rang
사회에게 메세지를 보낸다   
2008-10-15 17:08
callyoungsin
원조교제... 사회에 메세지를 던지는 김기덕감독의 작품이지만 재미는 없고 흥행성은 떨어지는   
2008-05-19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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