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은 왜 자꾸 영화를 만드는 걸까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보고 났더니, 홍상수는 혹시 감독이기 때문에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됩니다. 매너리즘에 빠졌다, 즉 타성에 젖었다는 비판 이상으로 혹독한 의심인데요. 빠지거나 젖은 것은 빠져나오거나 말리면 되니까 큰 문제가 아니죠. 그런데 밑천이 바닥난 거라면 어쩝니까? 바닥난 줄 알면서도 하던 일이니까 계속 하는 거라면? 그러지 못하게 할 권리는 홍상수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제 의심의 근거는 웃음의 소멸에 있습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강원도의 힘>을 거쳐 <오! 수정>에 이르기까지, 저는 홍상수 영화의 핵심을 ‘웃음’이라고 보는 편입니다. 현실에서는 지극히 평범해서 기억나지도 않을 장면이, 영화에서 보여지니까 무지하게 웃기는 거 있죠. 홍상수 감독은, 사람들이 의식 못하고 넘어가는 현실의 우스꽝스러움을 포착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고, 그것으로 영화에 대한 관습적인 기대감을 배반할 때 거둘 수 있는 효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먹히지는 않는다는 것 또한……
<오! 수정>은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홍상수 영화의 정점이었습니다. 제 식으로 말하면 가장 웃기는 영화였지요. 그래서 저는 그 다음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걱정 반 기대 반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립니다. 뭘 더 보여줄 수 있을까, 그런 걱정과, 뭔가 달라지겠지, 그런 기대…… 한마디로 기대는 무너지고 걱정은 맞아떨어진 것이 <생활의 발견>이었습니다. 영화가 뻔하더라는 겁니다. 잠깐, 그게 홍상수 영화에서 문제가 되나요? 홍상수 영화는 원래 뻔한 맛에 보는 거 아닌가요?
<오! 수정>까지 홍상수의 ‘뻔함’은 긴장을 동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뻔한데 뻔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보면서 웃을 수 있었던 겁니다. 지나고 나면 다 뻔하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지나가는 순간들이죠. 그런데 <생활의 발견>에 이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도, 뭐랄까…… 이제는 속이 들여다보인다고 할까요? 이제는 아무리 엉뚱하게 틀어도 심드렁하다니까요. 그러리라고 예측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가지 않은 길로 가도 이미 가본 길 같다는 느낌. 전에는 심드렁한 장면도 심드렁해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심드렁하지 않은 장면도 심드렁해 보인다는 거죠. 누구를 탓해야 하나요?
분명히 홍상수 영화는 <오! 수정>을 정점으로 해서 내리막길을 걷고 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를 예로 들까요. 흔히들 홍상수 영화에서 연기는 연기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감독이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아닐 겁니다. 홍상수 영화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사실 그것 말고 다른 게 뭐가 있습니까. 홍상수는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연기를 끌어내는 연출력이 뛰어난 감독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도 유일하게 높이 살 수 있는 것은 성현아의 연기입니다. 꾸밈없이 자연스럽지요. 더 정확히 말하면, 꾸밈없는 자연스러움을 참 잘 꾸며내고 있지요. 한마디만 더 보태면, 어색함을 정말 어색함으로 보이게…… 그런데 그게 쉽지 않은가 봅니다. 김태우와 유지태는 잘 안 될 때가 많잖아요.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보이려는 티를 너무 냅니다. 어색함도 인물의 어색함이 아니라 배우의 어색함으로 느껴지고…… 요컨대, 홍상수표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지나치게 의식하고 내보이려 한다는 거지요. <생활의 발견>에서 김상경도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웃음을 못 주지요. 한 끗 차입니다. 고스란히 감독의 책임으로 돌려야 마땅하겠지요.
홍상수 영화가 끝장을 본 게 아니냐는 제 의심이 어긋나기를 바랍니다. 다음 영화를 또 기대해야죠. 예전만큼만 만들어줘도 저는 즐거워하겠습니다. 그런데 관객의 착시 현상은 인정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더 맛있게 만들지 못하면 라면 맛이 떨어졌다는 소리 들어도 할 말 없다는 겁니다. 아예 다른 걸 만들어낸다면 맛의 수준을 비교할 것 없이 그저 새로움으로 어필할 수 있겠지만, 홍상수는 아마 그러지 않거나 못할 거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계속 같은 것을 만들어낼 생각이라면, 더더욱 변화가 요긴한 거 아닐까요.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권리도 홍상수 감독 말고는 갖고 있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