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디의 진정한 고수, 비틀기의 최강자 <슈렉>시리즈는 2004년 6월, 현재 애니메이션시장에서 하나의 문화코드로 확실하게 영토를 확장한 듯 보인다.
<슈렉>를 보면 웃긴다. 왜 웃기냐고? 그거야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장면들이 교묘히 짜깁기되어 화면 가득 펼쳐지기 때문이지. 그렇다고 이것 하나로만 우리를 웃기는 이유가 된다고 보기에는 몬가 부족하다. 관객이 웃는 이유는 ‘나도 알고 있는 것을 <슈렉>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건 단순한 지적 속임수 놀이이다. 난해한 것을 영화는 제시하지 않지만 보는 관객은 제시한 것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지적 만족감을 느낀다. 우리의 수준을 무시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공감할 수 있는 상식(ex, 유명한 영화, 유명인사, 캐릭터, 사회적 사건)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거기서 ‘차이’를 느끼게 하여 ‘전복성’을 획득, 관객으로 하여금 즉각적인 정서적 감흥을 끄집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패러디’의 정의다.
하지만 패러디는 간단한 듯 하면서도 이것을 영화전체의 봉합된 구조로 끌고 가기에는 다소 까다로운 면이 적지 않다. 적재적소에 톱니바퀴처럼 패러디 할 대상이 딱딱 맞아들어 가야지만 상황에서 오는 아이러니(or 차이)가 감독이 의도한 만큼 관객에게 단박에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슈렉>이 왜 할리우드 영화이면서도 할리우드를 조롱거리로 삼았는지, 왜 패러디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 잘 알면서도 간과한 매우 상식적인 얘기를 정리한 글이다.
● 컴플렉스 때문에 시작되다.
많은 사람들이 <슈렉2>의 웃음이 전편보다 ‘신랄’하지 않다고 한다. 월트 디즈니의 캐릭터들을 서슴없이 영화에 등장시켜 디즈니를 조롱한 전편에 반해 속편은 그때만큼의 풍자나 희화가 적었기에 실망 섞인 투정일 수 있다. 허나, 이것은 <슈렉>의 제작사 드림웍스의 야심을 간과한 데서 오는 착각이다. 디즈니로 상징되는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폭스(fox), 워너브러더스(Warner Bros), 드림웍스(DreamWorks)는 진정한 2인자의 자리를 놓고 디즈니의 정치학적 패러다임을 답습하는 고만고만한 작품을 내놓았다. 거기에 비해 디즈니의 기획력은 퍼펙트 했고 그것을 뒤엎기란 까놓고 말해서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했다.
‘완벽주의 콤플렉스’라고 질투 섞인 비난을 디즈니는 받았지만 그들은 보편적인 정서를 미국적으로 다듬어 치밀한 계획 하에 누구에게나 사랑 받을 수 있는 캐릭터로 승부수를 띄어 언제나 No.1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나갔다.
때문에 디즈니 이데올로기가 아무리 문제점이 많을 지라도 견고한 디즈니랜드의 철옹성처럼 그것의 빈틈을 찾아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원숭이도 나무에 떨어질 날이 있듯이 월트 디즈니는 결국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만다. 바로 제작자 카첸버그(Jeffrey katzwnberg)를 디즈니 3대 회장 아이스너(Michael D. Eisner)가 회사에서 내쫓은 일이다. 카첸버그는 그 뒤로 스티븐 스필버그와 손잡고 드림웍스를 창립한다. 이것만 봐도 굳이 드림웍스가 디즈니를 패러디 한 이유 즉, 애증의 관계를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디즈니는 할리우드 영화사들이 넘어서야 할 하나의 거대한 산이자 동시에 카첸버그 개인에게는 깨부수고 싶은 라이벌이 된다. 카첸버그는 <개미>, <치킨런>을 통해 조금씩 디즈니 애니메이션과는 전혀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다(이때까지만 해도 디즈니의 패러다임을 약간 수정한 수준이었다).
2001년 드디어 슈렉이라는, 영화史에 이렇게 못생기고 더러운 남자주인공은 없었다는 판례를 뒤엎는,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워 월트 디즈니에게 핵폭탄 선제공격을 날린다. 이것이 드림웍스社와 월트 디즈니社의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1차대전으로 보수와 진보의 정당 싸움처럼 지난한 힘겨루기의 시발점이 된다.
그렇다면, 카첸버그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졌는가? <슈렉2>를 보면 그것도 아니다. 또한, <슈렉>은 자신이 디즈니의 배 다른 자식임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동화책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여 해피엔드로 끝을 맺는 액자식 구조의 소주제들은 월트디즈니社의 변하지 않는 영원한 이념이자 소재인 가족의 화해와 이해, 진실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디즈니 컴플렉스’를 극복하고자 태어난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슈렉>은 2004년 컴플렉스를 인정하고 할리우드를 넘어서 세계 영화시장을 제패하려고 한다. 그 조짐은 ‘정치성’을 버리고 ‘대중적인 풍자’를 시작한 영화초반부터 대놓고 드러난다. 그리하여 <슈렉2>는 디즈니를 밑바탕으로 하여 할리우드 문화를 직접적으로 조롱하는 성공적인 단발성 속편이 아니라, 이젠 문화 아이콘으로 꾸준히 재창조될 명분과 이유를 부여받았다
● 슈렉은 왜 못생겼나?
<슈렉2>의 오프닝은 전편이 끝나는 지점에서 이어져 시작한다. 엽기 커플의 엽기 신혼여행은 폭소를 자아내지만 웃음을 유발시킨 이유는 못생긴 초록괴물 슈렉과 피오나가 아니라 그들이 연출한 상황이 <반지의 제왕>, <스파이더맨>등, 근자에 성공한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명장면을 재현한데서 오는 익숙함의 변형 때문이다.
그럼 슈렉과 피오나는 더 이상 캐릭터 자체의 ‘상징성’이 떨어지는가 에 대한 의구심이 들것이다. 여기서는 <슈렉>의 캐릭터 분석을 통해 결코 무엇을 얘기한다 치더라도 그들이 할리웃의 반항아로 영원히 남을 이유를 말하고자 한다.
왕따들의 얼짱! 슈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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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렉의 외모만 빼고 생각하면, 그는 할리우드 주류영화 남성캐릭터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성격을 지녔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진실을 볼 줄 아는 심미안하면, 두려움을 모르는 통큰 성격 거기다 여자에게는 한없이 보드라운 매너까지, 물론 이런 장점들이 상당히 거칠고 촌스럽게 표현되기는 하지만 슈렉은 분명 그들의 남성주인공과 크게 다르지 않는 성격을 가진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슈렉의 ‘못생긴 생김새’를 달리 이해해보면, ‘영웅은 외로워야 한다’라는 기본 명제를 만족시켜 주는 변형된 조건임을 알 수 있다.
외모 때문에 사회에서 타자인 슈렉은 점차 난이도가 높아지는 역경을 이겨내어 사람들에게 진정한 사랑과 존경을 얻어낸다. 다시 말해 할리우드식 영웅영화의 서사구조를 밟는 신화적 인물로 그려지는 것이다. 하지만 디즈니 만화의 야수처럼 사랑을 얻었다 해서 슈렉은 ‘변신’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반적 영웅서사(잘생기고, 더 나은 환경조건을 얻는 일 따위)와는 대치되는 결말이다. 슈렉은 그것을 ‘재현(반복)’은 하되 결말에 와서도 ‘변질(변신)’되지 않기에 ‘차이’를 발생시켜 ‘전복성’을 획득하는, 이 일련의 과정은 ‘영웅 이미지’의 이중부정으로 극대치의 패러디 효과를 누린다.
결론적으로 슈렉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끊임없이 답습 될 할리우드 영웅 판타지의 모방이며 패러디인 것이다. 따라서 정체성이 확실한 슈렉은 블록버스터의 명장면을 우리에게 ‘조크’로 보여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캐릭터가 된다.
성형을 거부한 피오나 공주
1편에서 피오나 공주는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를 패러디 한 마법거울 속에서 치열하게 백설공주, 신데렐라와 경합하여 뽑힌 예비 신부감으로 처음 등장했었다.
<슈렉>은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이야기 구조를 마음대로 뜯어고쳐 디즈니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남성에 의해 정체성을 확인 받는 여성을, 피오나를 통해 재현/해방시킨다.
피오나는 디즈니가 무수히 써먹은 ‘신분상승’에의 열망을 대놓고 조롱하는 캐릭터이다. <미녀와 야수>, <뮬란>등을 통해 똑똑하고 강단 있는 여성을 묘사하긴 했지만 언제나 디즈니는 그녀들 보다 더 나은 신분과 조건을 갖춘 남성을 등장시켜, 그녀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결혼’이라는 결말을 통해 완성하는 구조를 취해왔다.
피오나도 처음에는 디즈니 이데올로기에 철저하게 세뇌 당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초록괴물 슈렉과의 사랑과 자아를 직시할 줄 아는 성숙의 단계를 거쳐 그녀는 화려한 ‘궁’이 아닌 더럽고 습한 ‘늪’ 생활을 선택하면서 패러디의 진수와 통쾌함을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캐릭터로 거듭난다.
<슈렉2>에서는 피오나가 왜 디즈니식의 환상 속에서 슈렉을 만나기 전까지 살았는가 에 대한 이유가 나온다. ‘겁나먼 왕국’은 할리우드와 베버리 힐즈를 패러디 한 모습으로 그려져 그녀가 사치와 과장의 허울 속에서 살았음을 은유적으로 암시한다. 2편에서 피오나가 겪는 갈등의 원인은 못생긴 외모에 대한 자신의 불만 때문이 아니다. 자신들과 다른 것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고 타자화 시키는 미국주류사회의 보수성과의 갈등이다. 전편에 비해 피오나의 전복성은 시니컬하지 않지만, 미국보수사회의 이중성을 대리체험 하게 ‘풍자’하는 그녀의 상징성은 1편에 비해 강력해진다.
따라서, 우리는 할리우드에게 잠식당한 정식적 식민상태를 ‘피오나를 통해’ 재점검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슈렉>의 또 다른 주인공이자 기쁨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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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와 전혀 다른 형식/이야기/기술을 가지고, 디즈니보다 상업적 성공을 내기에는 장담할 수 없는 위험성이 많았고, 또한 애니메이션의 천성인 친숙함을 거스르면서까지 <슈렉>을 만든다는 일은 무모한 승부사로 보일 수도 있었다.
때문에 <슈렉>은 안전장치로 이야기 전반에는 디즈니의 고전인 <잠자는 숲 속의 미녀> 형식을 빌리고, 동키라는 ‘디즈니식 조력자’ 짝꿍을 등장시킨다. 하지만 안전장치를 배경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패러디의 대상으로 소환하여 재조립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의미를 생성시킨다. 동키는 모험과 위험을 같이 하는 조력자가 아니라 자신의 모성인 디즈니를 조롱거리로 만드는 일등공신으로 활약한다. 수다와 표정으로 만든 ‘동키’의 아이러니는 드림웍스쪽에서 보자면 그냥 웃긴 당나귀가 아닌 효자 노릇 톡톡히 하는 ‘적토마’임이 분명하다.
전편에 없던 새로운 등장인물이 2편에 추가됨으로써 <슈렉>은 디즈니형식을 안면몰수하고 적극적으로 빌려 웃음거리 소재의 배경화면으로 삼는다. 비운의 머릿결 왕자 프린스 챠밍과 장화 신은 고양이 그리고 요정 대모는 <슈렉>이 디즈니를 넘어 할리우드를 전체를 패러디 대상으로 지정했음을 보여준다.
주인공 슈렉 외모의 대척점으로 출연하는 프린스 챠밍은 예사롭지 않은 머리 흔들기 등장부터 과시하기 좋아하는 할리우드 스타를 조롱한다. 프린스 챠밍의 엄마이자 ‘겁나먼 왕국’의 마담뚜인 요정 대모는 디즈니 만화에서 항상 ‘선’의 상징으로 나왔던 요정 이미지를 비틀기 한 캐릭터로 여전히 월트 디즈니를 향한 드림웍스社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가오를 멋들어지게 흉내낸 장화 신은 고양이는 피오나가 전편에서 고민하던 외모만 보고 판단하는 우리의 위선을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야유하는 캐릭터이다.
조로 챙 모자를 들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한 순진한 표정을 짖는 고양이를 보고 필자 포함해서 자지러짐의 탄성을 안 내지른 관객은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를 풍자하든 비웃든 장화 신은 고양이만큼 밑도 끝도 없이 사랑스러운 캐릭터는 애니메이션 역사상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여기서 <슈렉>시리즈가, 점차 디즈니의 영화처럼 형식화되고 패러디의 컨벤션이 족쇄로 작용할지언정, 장화 신은 고양이 같은 익숙함의 차이를 전면에 내세운 캐릭터들로 상품적 가치를 쉽게 잃지 않음을 예견함을 알 수 있다.
<슈렉2>에서 피노키오의 <미션 임파서블> 패러디는 절정의 웃음을 준다. 물론 정치성을 버린 풍자여서 그런지 전편만 한 전복성은 떨어지지만 피노키오의 순진성을 경쾌한 한줄짜리 빤스를 입은 변태로 각색한 솜씨는 침이 마를 정도의 칭찬을 쏟아내게 하기에 충분하다.
또한, <슈렉2>이 지금까지의 애니메이션과 다른 점은 ‘게이코드’를 과감히 인용한 부분이다. 보수주의로 유명한 미국 애니메이션 역사상 게이가 등장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슈렉>은 신데렐라의 게이 언니를 천연덕스럽게 등장시켜, 타자를 인정하는 넓은 포용력(?)이라는 ‘문화 잡식성’으로 누구에게나 동일화 또는 공감을 이끌어내는 공격적 전술을 펼친다. 또한 이런 부분이 <슈렉2>의 결정적 성공요인이기도 하다. (반면 디즈니는 세계의 민담이나 사상을 미국식으로 해석해서 우리에게 반발심만 심어주었다.)
● 문화제국주의 패권은 누가 잡을 것인가?
‘패러디’는 영화 형식의 진화론을 증명하는 가장 손쉬운 예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슈렉>도 패러디의 새로운 방법론 모색이라는 진화를 통해 거듭 날것이 분명해 보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슈렉>의 탄생은 월트 디즈니에 대한 반발심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디즈니 만화왕국의 성공신화는 미국 자본주의의 성공역사와 정확히 일치한다. 문화제국주의를 이룩한 디즈니의 사업적 성공전략은 비판할 수 있지만 기실, 그것을 모델로 해서 벤치마킹을 해야 하는 것이 애니메이션계의 불변의 진리임을 부정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드림웍스와 월트디즈니로 양분된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현시장에서 우리가 <슈렉>이 가진 비판성과 노골적인 미국 사회의 조롱으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해서 전폭적으로 드림웍스가 디즈니를 이기기를 응원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슈렉2>는 디즈니의 사업전략을 자신들의 입에 맞게 체화한 상태에서 이젠 할리우드 자체를 좌지우지 흔들 수 있는 문화 아이콘으로 ‘슈렉’이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슈렉’의 무기는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문화 잡식성’이다. 이 점은 <슈렉>의 제작사 드림웍스가 노골적으로 디즈니를 포함한 할리우드 문화제국주의의 절대반지를 차지하겠다는 선전포고로 여겨도 무방할 듯 하다. 거기다 영화 안에서 패러디 한 대상을 다시 한번 다른 캐릭터가 패러디(동키가 따라한 프린스 챠밍의 머리 흩날리기)함으로써 할리우드가 자신의 모태임을 부정하지 않는 대담성마저 지녀 디즈니보다 강력한 상업적 전술로 문화영토를 넓히고 있는 실정이다.
자신의 정체성도 속이지 않으면서 또한 타자의 문화를 미국식 보수주의로 재단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변화무쌍한 풀코스서비스를 하는데 안 넘어갈 국가와 민족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할리우드 영화를 패러디 함으로써 이중 흥행효과를 누리는 <슈렉>과 미국영화사의 암묵적인 상호 협력관계는 우리에게는 문화제국주의의 사슬이 더 강력해짐을 시사한다. 그렇다고 <슈렉>이 보여준 가능성을 평가절하 하겠다는 소리가 아님을 인지해주기 바란다. 단지 ‘슈렉’이 2004년 현재 치르고 있는 문화전쟁이 할리우드(or 월트디즈니社)가 아닌, 우리를 상대로 한 제2차 세계대전임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슈렉>의 웃음은 ‘친숙함’으로 포장한 할리우드 영화들의 변형이다. 자신들의 영화 중 우리에게 가장 낯익은 작품을 ‘선별’해서 패러디 하는 작업은 달리 생각하면, ‘슈렉’을 통해 영화의 진정한 성공여부를 판가름하는 날이 도래했음을 알려준다.
할리우드에 군림하는 ‘문화권력자’ <슈렉>은, 더 이상 우리가 예전에 알던 ‘별난’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