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아래의 글은 <분신사바>의 ‘제작일지’라기보다는 현장에서 작업을 진두지휘한 안병기 감독의 소소한 또는 내밀한 감정을 간추린 짤막한 다이어리 집이라 보는 게 더 어울리는 활자들이다.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계층, 계급, 취향을 떠나 사활을 걸고 무슨 일을 진행시키는 사람의 마음은 다 한결 같은 거 같다.
가슴살이 떨리며 만감이 교차하는 영화현장에서 또는 숙소인 골방의 여관을 경유하며 감정의 결에 따라 써내려간 그의 공개된 비망록을 이 자리를 빌려 들춰본다.
2004년 3월 21일
드디어 crank in 이다.
우리는 촬영을 하기 위해 전주에 내려왔다.
전주관광호텔에서 한달 정도 머무를 예정이다.
다행히 숙소는 맘에 든다.
편히 지낼 수 있다는 건 스트레스 해소 중 하나다.
짐을 풀고 정리는 끝냈긴 하지만... 왠지 뭔가 빠진 듯한...
과연 잘 해낼 수 있을지...
다행히 이번 스탭들은 모두 좋아 보여 다행이다.
지금의 내 가장 큰 바램은 우리의 '분신사바'의 대박은 물론이고, 끝까지 아무 사고 없이
모든 일이 잘 되길 바랄뿐이다.
사람들을 만날 때의 처음 느낌... 설레이기도 하며 사람에 대한 기대감...
이 마음이 변치 않길 바랄뿐이다.
2004년 3월 22일
첫 촬영이 시작 되었다.
숙소에서 첫날밤을 지내고, 아침 일찍 일어나 분주하게 준비하고...
현장 도착!
설레임과 함께 밀려드는 뭔가의 기대감...
어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조명기와 카메라 장비들... 드디어 모니터 라인이 연결 되었다.
곧이어 들려오는 조감독의 소리 '슛 들어갑니다'
참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이때 갑자기 밀려오는 부담감은 뭘까?
스텝들의 초롱초롱한 눈을 볼 때 마다 나에겐 설레임보다는 긴장감과 함께 부담감이 더
커져가기만 하다.
한동안 일기를 쓰지 못했다.
처음의 각오와는 달리 점점 모든 일에 소홀해진다는 느낌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어제의 안 좋은 사건을 뒤로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어차피 오려고 예정 되었던 거였지만 하루 앞당겨 졌다.
그래도 다행이다. 사람이 다치지 않아서...
불미스러운 일이긴 해도 우리 영화가 잘 될 것이라는 좋은 징조로 믿고 싶다.
잃어버린 만큼 얻는 것도 있는 거니까...
다시는 불미스러운 일이 없기만을 바랄뿐이다.
2004년 4월 16일
다시 전주다!
1층 나이트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
이젠 정겹다.
처음 왔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느낌...
기나긴 여정을 떠나는 느낌... 단지 내일이 밝았으면 하는 바램일 뿐이다.
2004년 4월 25일
어느덧 촬영은 20회차다.
오늘은 대전으로 옮겼다.
뒤늦게 해가 떨어져서야 촬영에 들어갔다.
오늘 따라 왜 이리 싱숭생숭한지...
피곤함만 밀려온다.
2004년 4월 29일
헌팅을 하고 촬영에 들어가기 위해 현장에 도착했다.
촬영에 들어가려 하는 찰나 갑자기 소란이 들려왔다.
마을주민이 항의를 한 것이다.
바로 내 앞에서 감독이 누구냐며 소리치며 지나갔다.
그때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양해를 구해야만 했다.
다행히 어르신은 우리 촬영을 승낙해 주셨고, 무사히 한 장소의 촬영을 맞힐 수 있었다.
장소를 옮겨 '재훈의 집' 촬영 세팅을 분주히 하고, 나는 잠시 바람을 쐬려했다.
마을 회관 앞에선 어르신들의 술자리가 있었다.
잠시 발목을 잡힌 난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함께하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어르신들의 술을 한잔씩 한잔씩 넙죽 받아 마시며, 어르신들의 이런저런 삶의 얘기를 들으며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였다.
어느새 알딸딸해진 난 결국 얼굴이 붉어졌다.
한편 제작부 이하 연출부들은 나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찾아 헤매였단다.
취중으로 촬영을 하다니...
모든 배우와 스텝들이 날 보는 눈빛이 따가웠다.
오늘 역시 야간 촬영에 들어갔다.
분주한 스텝들의 모습을 뒤로 하고, 나는 콘티를 짜려고 뒤편에 앉아 있었다.
몇 분 후 한 여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자꾸 뭐라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로 내 주변을 맴돌았다.
참다못해 난 제작부를 불렀다.
이 여자 좀 저리 가라고 하라고.....
근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옆에 있었던 여자가 사라졌다.
난 너무 놀라 멀뚱히 제작부 아이를 말없이 바라봤다.
이놈도 어이가 없는지 날 놀란 토끼 눈으로 바라만 볼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내가 본 여자는 과연 누구였을까??
2004년 5월 2일
오늘 촬영 역시 진 빠지는 날이다.
규리 몸 전체에 피를 흥건히 뿌리고, 복도를 유유히 걸어 나가는 모습.
시간에 쫓겨 촬영을 하다보니 더욱 신경이 예민해 졌다.
NG가 날 때마다 더 힘이 들었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 쓴 배우도 있지만, 뭔가의 억눌림이 날 더 힘들게 하는 것 같다.
무사히 촬영을 맞힐 수 있었고, 다행히도 우리가 촬영을 맞힌 후에야 비가 내렸다.
2004년 5월 5일
카페레테 촬영이다.
오랜만에 풀들을 보니 기분이 좋다.
테라스에 앉아 콘티를 짜면서 적당히 부는 바람에 내 피곤함이 날아가는 듯 했고,
잠시나마 여유를 찾은 듯싶었다.
인터뷰가 이어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분신사바'를 하면서의 내 의도를 조금이나 비췄던 것 같다.
2004년 5월 9일
조금씩 '분신사바'가 홍보에 들어갔다.
쉬는 내내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 보았다.
쉬는 날이지만 쉬는 날이 아니다.
마케팅과의 싸움...
감독을 하면서 제작을 겸하는 고충이 아닌가 싶다.
2004년 5월 13일
세트 촬영에 들어왔다.
뭔가 쥐여오는 느낌이다.
다른 촬영들과는 사뭇 다른...
새삼스레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2004년 5월 15일
오늘따라 짜증이 많이 났다.
짧은 촬영의 일정이었으나 뭔가 분주한 분위기.
극중 은주가 고통에 겨워 울부짓는 씬을 찍어야 했기에...
정말 진 빠지는 하루였다.
욕심이 많아서 일까?
좀더 잘해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많다.
세트장(최면실)에서 포스터 촬영을 했다.
갑작스러운 거라 준비가 좀 미흡하긴 하지만...
감독의 의도를 가장 많이 드러내는 거라 생각된다.
스틸기사와 음악을 틀고 포스터 촬영에 임하였다.
다행히 배우들은 내 의도에 맞게 잘 따라 주었다.
가급적 우리 영화의 컨셉에 맞게 찍긴 했지만......
앞으로의 촬영이 걱정이다.
어려운 촬영만 남은 이때 부담감은 더 커져가기만 한다.
촬영이 끝난 후 배우 이하 스텝들과 회식자리를 가졌다.
오랜만의 회식이라 조금은 낯설기도 했다.
처음부터 이런 자리를 가졌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쁜 스케줄 속에 무심히 지나가고
말았다.
술한잔을 하면서 스텝들과 잠시나마 진솔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기분... 내가 흔들리면 안 된다라는 다짐을 새삼 다시 하게 되었다.
2004년 5월 25일
세트장을 온통 피바다로 만들었다.
극중 춘희가 김교장을 죽이는 장면에 있어서 피가 튀는 장면을 찍어야 했기에 특수효과를
이용하여 피를 분사 시켜야 했다.
의도와는 달리 사방으로 튀겨져 나가는 핏줄기...
순간 화가 났지만, 고생하는 배우와 스텝들을 보며 애써 참아야 했다.
이날 세트장 바닥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들이 피로 물들었다.
힘들고, 짜증나는 촬영이었지만 지난 지금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남는다.
2004년 6월 7일
마을 외곽 창고 터지다.
우리 영화도 블록버스터임을 확인케 했던 촬영.
이날 역시 연출 의도와는 달리 창고가 터져 나갔다.
극중 유진이 마을 외곽 창고를 불태우는 장면이었는데...
폭열로 인해 창문 정도 터지는 것을 생각했는데...
전혀 생각에 없던 창고 전체가 날라가 버렸다.
순간 '뻥'하는 소리와 창고의 천장이 날라간 것...
불길은 하늘을 날으고, 크레인에까지 불길이 옮겨졌다.
이어 산속의 나무에 까지...
큰 불이 나면 어쩌나 싶어 모두들 소화기며 물줄기를 들고 뛰어 다녔다.
다행히 다친 사람도... 큰 불도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2004년 6월 12일
벌레들의 공격!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많은 벌레들을 보는 것은 아마 처음일거다.
촬영을 하기 위해 우리는 뚝길로 자리를 옮겼다.
분주히 촬영 준비를 하고, 촬영을 하기 위해 라이트의 불이 켜지자 수만마리의 벌레들이
라이트 앞으로 몰려들었다.
벌레들로 인해 라이트까지 꺼지고...
촬영을 이대로 강행해야할지... 난감했다.
사람들에게 까지 달려드는 벌레들의 공격에 마스크를 동원 온갖 살충제를 뿌려대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전혀 꿈적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쁜 일정이라 촬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극중 인숙이 죽는 장면!
불에 타 죽는 씬 이기에 신중해야만 했다.
보조출연들이 횃불을 들고 인숙을 위협하는 장면이었지만, 도저히 그들을 시킬 수가 없어 결국 난 횃불을 들어야 했다.
불로 인숙에게 위협하며 욕설을 퍼붓는... 카메라에 불길이 살아야 하기도 하고, 인숙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확실히 보여줘야 하기에 내 스스로 욕심을 부렸나보다.
결국 유리(극중 인숙)의 손에 화상을 입혔다.
괜찮다라는 유리의 말에 더 미안해졌다.
유난히 불 장면이 많은 우리 영화......
참 힘들고, 준비하는데 기다리는 시간이 유난히 길었던...
하지만 다행히 오늘 촬영을 맞힐 수 있어 마음은 홀가분하다.
오늘 역시 촬영의 주제는 불이다.
극중 마을 사람들이 춘희의 집을 불태우는 것.
드디어 횃불이 던져지고, 춘희의 집에 불을 재빨리 태우고 뒤로 빠지는 특효팀의 팀장이
프레임 아웃 동시에 카메라는 돌아가고.... 떨리는 순간 이였다.
삽시간에 불길은 하늘을 치솟듯 솟아 올르고, 순간 온통 불바다가 될까 염려 되어 컷을 외쳤다.
모두 놀라 여기저기서 울리는 소리.........
'불꺼! 불꺼!' '컷! 컷! 컷!!' '소방차~!!!'
정신없는 순간 이였다.
곧이어 들리는 웃음소리...
그때서야 난 안심할 수 있었다.
촬영을 하면서 스턴트맨의 사고에 이어 큰 사고가 나는 줄 알았던 나는 너무나 가슴 졸였었나보다.
모든 불길이 사라지고 나서야 안심 할 수 있었다.
밤샘 촬영 끝에 이어지는 몇 시간 후의 엔딩 촬영...
촬영을 하기 전 작은 모텔로 옮겼다.
잠시나마 잘 수 있을까 해서...
피곤함이 밀려오지만 막상 잠이 오질 않는다.
벌써 마직막이라는 생각을 하니......
주섬주섬 짐을 싸서 집을 나온 지가 엊그제 같은데...
드디어 시작된 마지막 촬영.
바닷가 촬영으로 이어졌다.
스산한 바람이 내 마음에 잠시나마 평온을 주는 듯 했다.
날이 좀 밝았으면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좋았다.
마지막 컷을 외치고 모두 박수를 쳤다.
뭔가 저 파도만큼 밀려오는 설레임...
모두 모여 그 자리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돌아서는 순간~!
스텝 한명이 날 바다로 던져 버렸다.
나에게 들었던 설움과 지금까지의 고생을 던지듯.......
한명 한명 바다에 몸을 던져 지금까지의 노고를 훌훌 털어버리는 듯 했다.
설사 난 내일 편집을 위해 또 다른 전쟁을 치러야 하지만 지금의 난 이 순간이 너무도
행복하고, 후련하다.
매번 촬영을 거듭해 나아가면서 느끼는 순간이긴 하지만 사뭇 다른 느낌에 가슴 한구석이
저려오기도 했다.
이 사람들과 또 다른 안녕을 해야 하기에.........
2004년 7월 10일
모처럼 휴식을 취하고 싶은 마음에 집에서 뒹굴렀다.
직업병인지 잠시 후 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인터넷 접속을 하고, 분신사바를 검색 창에 쳐봤다.
그리곤 홈페이지에...
예상외로 분위기가 좋았다.
'분신사바'를 기다리는 팬들로 가득 했다.
게시판의 글을 읽어보고, 그곳엔 나에 대한 기대감.. 혹은 영화에 대한.. 물론 우리 영화를
비판하는 글들도 몇몇 눈에 띄었다.
아직 개봉도 안 된 영화를 벌써부터 비판의 글을 써 올리다니.......
순간 발끈 하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마 만큼의 기대가 크기에 그러리라 믿고 싶었다.
조금은 심난하다.
괜히 들어갔나 싶기도 하고.. 관객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말아야 하는데...
하지만 이 계기를 발판 삼아 더 열심히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겠다.
지금 내가 이렇게 한시간 한시간 쉴 때마다 관객은 날 뒤로 할 것이다.
그마만큼 마지막 믹싱 그리고 홍보를 위해 내 스스로 우리영화의 발이 되어 뛰어야겠다는 결심을 한번더 하게 되었다.
난 이제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영화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기에 내가 존재하니까.......